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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01. 2021

국부 코시모와 피렌체 공의회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


1428년 예순여덟 살 조반니가 사망하자 마흔이 된 코시모(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가 가업을 물려받았다. 대외 업무에서는 이미 뛰어난 수완을 입증한 터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훌륭한 덕목과 관대한 성향까지 겸비하여 주변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콘스탄츠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이때 구축한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파리, 런던, 브뤼헤, 리옹,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등 16개 도시에 은행 지점을 설립했다. 물론 로마 지점은 교황청 금고 안에 있는 막대한 자금을 여전히 운용하고 있었다.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1460)>

코시모는 1430년 라르가 거리와 고리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 부지에 새 궁전을 짓기로 했다. 이전의 궁은 방어를 위한 성채였을 뿐이다. 쾌적한 공간으로서의 궁전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다행히그는 절제를 알았다. 당대 최고의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이 지나치게 웅대해지자 미켈로초가 제의한 단출한 설계안을 채택했다. 훗날 정적 알비치 파가 이 궁전을 일컬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야심’이라는 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433년 코시모는 결국, 축출당했다. 건축 사업이 중단되었고, 코시모가 베네치아로 망명길을 떠날 때 미켈로초가 동행했다. 조각가 도나텔로도 코시모를 내몬 피렌체가 싫어 고대 건축을 공부한다며 로마로 떠났다. 

코시모가 떠난 이후 피렌체는 재정이 흔들렸다. 그러자 그의 추방령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1년 만에 되돌아온 그는 1434년 10월 6일 곤팔로니에레(최고 행정관)에 선출되었다. 이제 피렌체는 공화정의 형태를 띠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코시모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는 그가 죽은 후 시뇨리아가 그에게 부여한 특별한 명예로 비명에 새겨졌다. 


피렌체 공의회의 유치


교황 유게니우스 4세가 8년간 피렌체에 머물렀다. 바젤 공의회의 교회 개혁안을 거부한 것이 빌미가 되어 밀라노 공작 필리포 비스콘티의 군대가 로마로 진격했고, 1434년 교황은 변장한 채 로마를 빠져나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1437년 교황을 압박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죽었다. 교황은 즉각 바젤 공의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이탈리아 페라라에서 새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바젤 공의회는 유니게우스의 폐위를 선언하면서 반격했다. 그러나 참여자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바젤 공의회가 해산되었다. 페라라 공의회의 주제는 동로마 콘스탄티노플 지원 문제였다.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은 라틴 군주들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며 동서 교회 통합을 시도했다. 주교, 수도사, 학자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로 구성된 700명 정도가 베네치아에 상륙했고, 1438년 1월 5일 마침내 페라라 공의회가 열렸다.

 

진전 없이 일 년간 진행되던 공의회는 1439년 2월 장소를 피렌체로 옮겼다. 역병이 창궐한 가운데 코시모가 여행 경비 4천 플로린과 더불어 무료 숙식 세공을 약속함으로써 성사되었다. 이로써 피렌체의 정치적 영향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교역량을 증가와 함께 학문 증진에 분기점을 마련했다. 동로마 황제 요한 팔레올로구스가 수행단을 이끌고 피렌체에 도착했다. 코시모는 예우를 다했다. 3월 2일,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얹은 대성당에서 동방교회와 서방의 로마 교회의 주요 관계자와 거물급 지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의회가 재개되었다.

공의회는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했고, 14년 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때 ‘새 지식’이 피렌체로 대거 유입되었다. 특히 게미스토스 플레톤(Gemistos Plethon)과 그의 제자였던 니케아 주교 베사리온과 같은 동방의 성직자와 학자들로 인해 촉발되었다. 특히 코시모는 플라톤 철학의 열렬한 추종자인 플레톤한테 마음이 빼앗겼고, 이때 나눈 대화를 통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도미니크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수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주류였던 시대였다. 플레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신론자로 몰아붙이면서 플라톤의 논리가 오히려 기독교적 체계에 호응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베사리온은 동서 교회 간 화해의 열쇠는 플라톤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로스 킹, <피렌체 서점 이야기>)

 

이들과 함께 유입된 비잔틴 지역의 다양한 희귀 필사본들로 인해 고대 문헌의 권위를 비교, 검토해 볼 수 있었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이 드러났다. 이중 상당수는 중세 이전 수백 년 된 교회 관련 저작물이었다. 특히 8세기 문헌을 뒤지다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와 저명한 <교령집>이 위조문서라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전체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교회와 신도들에 대해 가지는 권한인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훗날 활자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 사실이 독일과 영국에 전파되면서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기독교 사상에 관한 강한 호기심을 유발했다. 예술적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라 안젤리코, 베노초 고촐리,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같은 화가들이 동방의 주제를 표현할 때 떠올린 의복과 장식물들은 공의회에 참석한 비잔틴 사람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J.K. 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


문화는 어떻게 전승되는가?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이며, 따라서 도서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1099년 십자군 1차 원정이 끝나고 100년이 못 되어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어릴 때부터 인문학에 열정을 지녔던 코시모로서도 비잔틴 제국의 고문서를 수집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2000년 동안 잊혔던 고대 그리스의 유물을 모으고, 관련 서적을 소장, 번역, 출판했다. 팔지 않을 땐 필사본을 제작했다. 이렇게 수집된 고문서를 45명의 전문가를 고용하여 옮겨 쓰게 하였으며, 1443년 당대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가 있었던 산 마르코 수도원 안에 세운 메디치 도서관에 보관했다. 서구 최초의 공공 도서관이며, 그야말로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의 보물 창고였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후로 많은 고대 문서가 유입되었다.

 

가문의 번성기를 연 코시모는 인문학적 소양이 상당했다. 그 자신이 르네상스 형 인간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그는 유럽이 소위 ‘암흑기’라고 일컫는 중세를 벗어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비잔틴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으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차이를 공부했다. 코시모는 플레톤과 피렌체 출신 천문학자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의 흥미로운 인연을 맺어준다. 토스카넬리가 코시모 초청으로 그의 궁정을 방문했을 때 플레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의 지리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콜럼버스가 1479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인도를 향해 서쪽으로 항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인류 전체로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플라톤 아케데미로 사용한 <케리지 별장>

코시모는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에게는 플라톤을, 그리스의 학자 아르기로풀로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번역을 의뢰했다. 그러나 말년에 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지면서 1462년 마르실리오에게 카레지 별장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짓고 운영토록 했다. 주치의 아들인 마르실리오는 일찌감치 학자의 자질이 눈에 띄어 코시모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인물이다. 그가 고대 그리스어로 된 플라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면, 코시모와 인문학자들이 모여 그 책을 읽고 토론했다. 

아들 로렌초에게 와서 피렌체에 신플라톤주의가 자리 잡혔다. 이로써 이탈리아 전역에 고대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을 비롯하여 수학, 의학, 공학, 건축 분야에서도 혁신을 유도해냈다. 예술가들에 의해서 신플라톤주의는 시각언어로 표현되었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프라 안젤리코,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파울로 우첼로 등의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이 메디치 가문의 그늘에서 활동했다. 피렌체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 비해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신학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 메디치 도서관 관장 토마소 파렌투첼리가 훗날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되어 '인문주의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는 메디치 도서관을 닮은 바티칸 도서관을 세웠다. 한편 인문학적 소양과 노력을 고려해 볼 때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코시모가 목적했던 바가 단순히 상업적인 이득을 넘어선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피렌체로는 어려워도 로마와 바티칸 교회, 나아가 모든 기독교 국가의 통합을 통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뜻)의 재건을 꿈꾸었을 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플라톤 아카데미는 국가경영을 위한 철학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기능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려 했던 한 사실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교회의 분열은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이후 유럽에 미친 역사적 대가는 혹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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