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대결
아르노강이 흐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영어로는 플로렌스, 꽃이라는 뜻)에는 열세 살 단테가 첫사랑 베아트리체를 만났던 베키오 다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을 피한 유일한 다리다. 시청사를 지나 다리를 향해 가다 보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1501~1504)>, 바초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1525~34)> 등 르네상스 시대 걸작 조각품들이 열병식을 한다. 홍수를 피해 모조품을 전시했다고 가벼이 여기면 곤란하다. 조형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작가의 창조성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법이다.
원래 <다비드>의 자리에는 도나텔로의 <유디트 상>이 있었다. 그러나 후배 조각가의 작품에 밀려 로지아 회랑으로 옮겨졌다. 미켈란젤로에게 영감을 선물했던 도나텔로로서는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했을 법하다. 광장에서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면,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길 양편에 배열된 대리석 인물상, 단테, 보카치오, 보티첼리,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곳 피렌체가 배출한 동시대의 대가들이다. 르네상스의 발생지가 피렌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다. 그러나 발길을 잠시 멈추고 피렌체 산 조반니 광장 건축물들을 둘러보아야 후회 없이 피렌체 여행을 마칠 수 있다.
이곳엔 세 개의 중요한 구조물이 있다. 먼저 유명한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산타 마리오 델 피오레이다. 피렌체 대성당을 이렇게 부른다. 영화 <냉정과 열성 사이>에서 준세이와 아오이가 10년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그곳이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대성당과 짝을 이루는 ‘조토의 종탑’과 ‘세례당’이다. 세례당은 신자들의 세례 의식을 집행하는 곳으로, 성당과 독립하여 세워진다.
1401년 이곳 세례당의 두 번째 문(지금의 북문)을 장식할 청동 부조 두 짝을 제작할 조각가를 선정하는 경연이 있었다. 도시 전체가 신에게 바치는 이 사업은 ‘모든 나라의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국제입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네 잎 장식' 모양에 구약 성서 창세기(22장 1-19절)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을 주제로 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어 겨우 얻은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다.
쟁쟁한 조각가 모두가 공모에 참여했다. 당시 열세 살 도나텔로는 출품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로자 마리아 체츠는 <르네상스의 미술>에서 도나텔로의 참가를 언급했다. 그러나 G.F. 영의 주장에 따랐다)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디 비치가 계약 결정권자의 일원으로 참석한 1차 심의회에서 시에나 출신 야코포 델라 퀘르치, 피렌체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Pilipo Brunelleski, 1377~1446)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가 통과했다. 그리고 피렌체인 둘이 최종 결선에 올랐다.
먼저 기베르티의 작품이다. 제단 위에 이삭을 향해 아브라함이 칼을 들이대고 있다. 상황의 긴박감보다는 정교한 조각의 기교를 통해 완벽한 인체를 표현했다. 균형과 조화 면에서 뛰어나며 아브라함의 몸이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삭의 몸은 그리스의 신 중 가장 잘 생겼다는 아폴로 상을 본 떠 만들었으며 단 한 번의 주조로 능숙하게 제작했다. 금 제련사였던 아버지 바르톨루치오로부터 전수받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이삭을 어린아이의 가냘픈 육체로, 아브라함을 나이 먹은 할아버지로 표현했다. 사실적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칼을 찌르려는 순간,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가 아브라함을 급히 제지한다. 매우 힘차며 극적이다. 마지막으로 왼쪽 하인의 모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명한 청동 작품 <가시 뽑는 소년>을 모방했다. 그러나 일곱 개 부분으로 주조하여 서로 용접시킴으로써 기베르티의 작품에 비해 세련미가 부족했다.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의 작품에서 우열을 가를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이 합동 제작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는 작업 스타일이 달라 불가능하다며 자진 사퇴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기베르티의 부담감을 없애 준 행위다. 기베르티는 21년 만에 두 짝의 문 양편에 각각 14개씩 총 28개의 부조를 완성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보다 아홉 살 적은 도나텔로와 함께 기약 없이 로마로 떠났다. 도나텔로는 로마에서 고대 조각상과 건물, 유물들에 관심을 보였다. 2년 후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를 먼저 피렌체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남아 15년을 더 건축을 공부했다. 그리고 돌아와 보란 듯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피렌체가 풀지 못했던 숙제를 해결했다. 세계 네 번째 규모인 대성당의 쿠폴라(cupola, 원형지붕의 돔)를 세웠다. 이로써 성당을 짓기 시작한 지 무려 150년 만인 1436년에 건물이 완성되었다.
시민들이 "돔만은 고딕식으로 세울 수 없다”고 거부했기에 이렇게 오래 걸렸다. 이탈리아인에게 '고딕 Gothic'은 '야만'을 의미한다. 고트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고딕식은 그간의 장점을 모은 최신 건축 기법이었다. 12세기 쉬제에 수도원장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 지은 생드니 바실리카로부터 시작되었다. 성당 건축물은 압축에 견디도록 설계되었다. 둥근 천장의 지붕은 압력을 벽의 바깥으로 분산시키고 바깥에 세워진 기둥은 안쪽으로 압력을 가하는 절묘한 공법이다.
그러나 직경 42m, 높이 107m 반구형 돔은 너무나 육중했고, 내부 공간이 어마어마했다. 비계(飛階)를 사용할 수도, 돔을 지탱할 벽과 건물 본채를 연결해 줄 벽받이를 설치할 수 없었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혁신적인 공법이 필요했다. 1418년 8월 19일 돔 공모전이 열렸고, 기베르티와 다시 대결했다. 이때 부르넬레스키는 비계가 없이도 돔을 세울 수 있다는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은 그에게 평가위원들은 어떤 식으로 지을 건지 모형을 보여 달라는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달걀을 깨트려 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콜럼버스의 달걀’보다 70여 년 앞선 일이다. 위원회는 로마의 영광이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고려하여 그의 시안을 채택했다. 1425년 조반니 디 비치는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임무를 맡기기로 최종 결정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 유학 당시 1,400년 전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지은 판테온에서 터득한 방법을 사용했다. 아치형은 상부의 하중을 양편으로 분산시킨다. 그리고 지붕은 얇게 두 겹으로 설계하여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무게로 인해 생기는 장력을 줄였다. 무거운 안쪽 천장이 가벼운 바깥쪽 천장을 받치며, 돔 사이 공간에는 계단을 놓았다. 아치형 둥근 천장(볼트, vault)의 서까래(rib) 돌 벽돌을 물고기 등뼈처럼 서로 맞물리게 비스듬히 쌓아 올려 거의 자체 구조만으로 하중을 버틸 정도였다. 그렇게 지지대 없이 버틸 수 있는 각도를 조성하다 보니 돔의 단면 기울기가 가팔라졌다. 마침내 바깥쪽 지붕의 여덟 개의 골조가 모두 궁륭 끝 랜턴(lantern)으로 모이는 돔의 구조가 완성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건축 재료가 19세기에야 선을 보인 '철근’이 섞인 콘크리트 혼합물이다. 압축과 장력을 모두 견딜 수 있는 재료로, 기원후 126년 완공한 판테온의 천연 자재와 비교할 때 브루넬레스키가 발전적인 공법을 강구했다고 보아야 한다. 좌절한 조각가였던 그가 건축가로 다시 태어나 1420년부터 1436년까지 무려 16년에 걸친 지난한 작업 끝에 완성한 팔각형 ‘브루넬레스키의 돔’이다. 그러나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했다. 여하튼 그는 새로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를 넘어 이탈리아의 자존심이 되었고, 그 뒤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아! 이 과정 중에 한 가지 사실을 빠트렸다. 평가위원들은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을 못 미더워 이번에는 세례당 부조에서 그를 이겼던 기베르티를 공동 제작자로 참여시켰다. 그러나 그는 조각에서는 뛰어났지만, 전례가 없었던 돔 건축에는 그야말로 문외한이었다. 시공 과정 내내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했고, 넘을 수 없는 벽(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브루넬레스키로서는 10여 년 전 경연의 패배를 멋지게 설욕한 것이다. 사실 그의 <이삭의 희생>은 표현에 있어서 시대를 너무 앞섰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던 대중은 기베르티의 기교에 찬사를 보냈음 직하다. 브루넬레스키는 죽어 피렌체 대성당 돔 정중앙의 아래 바닥에 묻혔다.
그러나 기베르티에 대한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다. 브루넬레스키가 죽은 1452년, 기베르티는 28년에 걸쳐 세례당에 부착할 두 번째 청동문 한 쌍 <천국의 문>을 완성했다. 백 년 뒤 미켈란젤로가 “정말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손색이 없다”라고 감탄하여 이름 붙은 동문이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열 장면을 부조로 만들었다. 이로써 기베르티는 피렌체 제일의 조각가로 우뚝 선다. 일흔세 살 때 일이었으며, 3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당시 기베르티의 작업장은 재능 있는 후진들을 위한 완벽한 예술학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고용한 보조 작가 중 훗날 자신의 명성을 능가하는 두 사람이 탄생하는데, 바로 로마에서 돌아온 조각가 도나텔로와 화가 마사초가 그들이다. 우린 경쟁자 중 우승자에게 집중하면, 패배자를 가벼이 여기는 실수를 흔히 저지른다. 브루넬레스키에게 찬사를 보내듯 기베르티 역시 위대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