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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ug 21. 2021

피렌체 공화국의 출발

2009년 12월 눈 내리는 피렌체(사진 출처; 위키백과)

14세기 페스트와 15세기 들어 백년전쟁, 장미전쟁 등 잇따른 전란으로 유럽의 열강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제 몸 간수하기에 바빴다. 이즈음 기원전 8세기 에트루리아인들이 번성했던 이탈리아반도 중북부 토스카나에서 화려한 문화대국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공화정다운 공화정 체제’, 즉 로마의 위대함이 살아 있던 도시국가 피렌체가 그 주인공이다. 


1115년, 토스카나 후작령을 관할하던 마틸데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피렌체는 중세 자치도시 꼬무네(commune) 체제를 설립했다. 처음 100여 년은 토착 귀족들이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인구 증가와 함께 신흥 세력 보르게제(boreghese, 프랑스어 부르주아에 해당)의 규모가 커졌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주교와 토착 귀족층은 기벨리니파(황제파), 시민 계층과 노동자, 농민들은 구엘프(교황파)에 가담하여 세력을 다투었다. 이는 기벨리니파가 지역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1190)와 손을 잡으면서 생긴 당파 싸움이다. 

멋진 ‘붉은 수염’을 달고 기사도의 모범을 보였던 황제로서도 교역을 위한 돈이 필요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생긴 변화이다. 하지만 도시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독일 지역은 척박했고, 교환수단으로서 돈이 없었다. 반면 많은 도시들이 바다에 접한 이탈리아 반도는 이미 로마 제국 시대부터 돈을 사용했고 풍요로웠다. 황제는 법리적으로 자신이 1000년 전 고대 로마의 모든 권리를 승계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반도 중북부에서 성장하고 있는 꼬무네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한편, 성직 임명권을 두고 대립해온 교황의 권한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려 했다. 

그는 총 여섯 차례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반도 내부에도 계파간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파벌은 1289년 캄팔디노 평원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구엘프파가 승리했다. 젊은 단테가 구엘프파로 참전했던 이 전투 이후 피렌체는 각 길드 대표자로 구성되는 시뇨리아(시의회)라는 통치 집단을 구성했다.


☞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매너리즘) 양식의 대표적 초상화가 아뇰로 브론치노(Agnolo Bronzino, 1503~1572)가 그린 <단테의 초상(1530년경)>이다. 미술사학자 필리프 코스타마냐가 어느 정비공장 사장의 집에서 발견했다. 프레스코화가 대세였던 16세기 피렌체 ‘최초의 캔버스 회화’ 작품으로, <미술가 열전>을 쓴 동 시대 미술사학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서술을 기초로 진품임을 확인했다.


백년전쟁 중인 유럽에서는 1348년부터 페스트가 퍼졌다. 피렌체에서도 11만 명이던 인구가 지오바니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완성한 1851년 4만 5,000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그러나 흑사병이 물러나고 전쟁(1260년 시에네, 1375년 대(對) 교황청, 1397년 밀라노)이 끝나자 인구 증가와 함께 호황을 맞았다. 당시 피렌체는 금융업에 있어서 경쟁 상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양털과 모직 의류를 주요 생산품으로 하는 직물 산업은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했다. 공화국의 세입은 30만 플로린(피렌체) 금화에 달했다.


“그것은 귀금속의 가치 하락을 고려하더라도 60만 영국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이며, 200년 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가 엘리자베스에게 바친 세금보다 더 컸다.” (19세기 영국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매콜리의 언급으로 G.F. 영의 <메디치 가문 이야기>에서 재인용)


직물 산업이 번성했던 피렌체에서 1378년에 촘피의 난이 발생했다. 촘피(ciompi)란 양모 노동자들이 신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나막신이 석판이 깔린 보도 위에서 내는 소리를 흉내 낸 말이다. 하지만 양모 제조에 국한되지 않고 시계 제조공을 포함한 극빈층의 노동자들이 그들만의 길드를 요구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이때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촘피 반란을 지지하면서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유력인사로만 구성되어 온 과두정의 시뇨리아는 21개 길드 대표 체제로 재편되었다. 의원들은 두 달에 한 번씩 선출되었으며, 큰 문제가 터지면 시뇨리아 궁전에 있는 ‘바카(Vacca)’라는 큰 종을 쳐서 남자 시민들을 광장에 소집한 뒤 ‘대중의 갈채’로써 대안을 정했다.

1402년에는 밀라노 공국이 피렌체를 포위했다. 그러나 갈레아초 비스콘티 밀라노 공작이 때맞춰 사망하자 피렌체는 신의 보살핌으로 여겼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지역 패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아레초에서 리보르노까지 세력을 넓힌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토스카나 지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자유를 상징하는 이탈리아반도 내 자치 도시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피렌체 공화국은 그곳 시민들로만 구성된 정치 권력이다. 따라서 피렌체에 의해 정복된 피사, 프라토, 피스토이아, 볼테라, 그리고 그 밖의 도시들이 끝까지 저항했던 이유로 작동한다. 이곳 피렌체에 르네상스 시대를 견인한 가문이 탄생했다. 귀족이 아니면서 미술계의 패트런이자, 가톨릭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한 메디치 가문이 그 주인공이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400년경 그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그의 아들 코시모로부터 출발하여 로렌초까지 50여 년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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