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르네상스 초기 화가 베노초 고촐리는 메디치궁전 내진(內陣, chancel) 벽면에 예수 탄생과 관련된 일화를 그렸다. 그리고 예배당에는 종교화 형식을 빌어 메디치 가문의 역사화를 그렸다. 바로 <동방박사의 행렬>이다. 동방박사 3명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셉과 비잔틴 황제 요한 팔레올로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디치 가문의 열 살밖에 안 된 로렌초를 나란히 대입했다. 가문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를 상징한 그림 속 세 명의 동방박사 뒤에는 수행원들이 따른다. 피렌체의 인문학자들은 물론, 비잔틴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 무리를 이끄는 인물들은 코시모를 비롯한 메디치가 사람들이다. 각 인물은 당시 의상과 업적, 취향까지 상징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작업했다.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인 고촐리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빠른 작업 속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에서 메디치 가문 초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부(富)의 기반을 쌓다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아어에서 '의사'를 뜻하는 '메디코(medico)'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가문의 명칭이 의사, 약제사, 나아가 염료 상인 등의 직업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근거가 없다. 메디치 가문은 무젤로에서 피렌체로 이주했다. 13세기 이후 점차 영향력을 키웠으나 1300년대 메디치가는 소소한 사채업과 폭력 사태로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피렌체 정치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던 가문은 1378년 촘피의 난을 지지함으로써 평민의 편을 들었다. 20년 뒤 먼 친척 안토니오가 숙적 알비치가의 지도자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인 죄로 참수되었다. 그리고 1400년 또 다른 음모가 실패하면서 메디치 가문은 20년 동안 공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는 선대와 달리 신중하고 절제를 알았다. 부동산과 금융업 등으로 부를 늘려 1410년에는 피렌체에서 세 번째 반열에 올라섰다. 회계 능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337년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 백년전쟁에서 메디치 가문은 영리하게 처신했다.
당시 피렌체의 다른 막강한 가문들은 전쟁 초기 잉글랜드의 우세와 양모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잉글랜드 편에 섰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잉글랜드가 채무 불이행 상태가 되자 많은 가문이 줄줄이 도산했다. 예를 들면 1341년 약 18만 파운드를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에게 빌려줬는데, 이 중 7만 7,000파운드가 있었던 페루치가(家)가 1343년에 파산했다. 그리고 3년 뒤 바르디가가 그 뒤를 따랐다. (데즈먼드 수어드, <백년전쟁 1337~1453>) 반면, 메디치가는 영국과는 일정 거리를 두었으며, 전쟁이 끝나갈 즈음 프랑스와도 거래를 텄다. 결국,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가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메디치 은행은 15세기 유럽 최대 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이 메디치 가문을 기억하는 까닭은 무상한 부와 권력 때문이 아니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탄생한 인본주의와 천재 미술가들의 활동 덕분이다. 정치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와 그 주변 지역으로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데 가차 없었다. 반면, 학문과 예술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너그러웠다. 물론 메디치 가문만이 동시대의 유일한 후원자는 아니었다.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 가문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유럽 전체로 확대해 보면, 신성로마제국을 후원하는 독일의 거목 야코프 푸거 가문이 버티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부도 푸거 가문에 비하면, 지방 은행의 지점에 불과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였다고 한다.
야코프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은행과 광산 등에 손을 대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 유럽이라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막시밀리안 1세를 도와 평민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리고 백작의 작위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이번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손자 카를 5세가 황제 되는 것을 도왔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510년 아우구스부르크에 소재한 푸거 가문의 무덤 예배당에 묘비를 설계해 줌으로써 도약을 발판을 마련했다. 1525년 야코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재산은 유럽 내 총생산의 2%에 육박했다고 한다. 코시모 메디치의 자산을 순금으로 환산하면 1,750kg 정도였는데 100년 후이긴 하지만, 1546년 야코프 푸거가 보유한 기업의 자본금은 순금 1만 7,000kg에 달했다고 하니 대략 10배 이상 많았다.
여하튼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대에 교황의 금고를 관리하면서 1420년에는 이탈리아반도, 나아가 유럽 최고의 부를 축적한 가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재력과 인격을 갖추었던 조반니는 평민 출신임에도 곤팔로니에레에 선출되었다. 1426년 그는 가문이 시민들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치를 단행했다. 불공평하게 운영되던 인두세(人頭稅)를 재산세 형식으로 바꾼 카타스토(Catasto) 제도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재력을 갖춘 이들이 세금을 더 내게 되어 귀족들의 반발이 컸으나 이를 무시하고 강행했다.
* 피렌체 꼬무네는 9명의 시민 대표 ‘프리오’로 구성된 시뇨리아(시의회)에서 운영되었으며, 그중 한 명의 최고 행정관을 말한다
코시모의 아버지 조반니가 로마 교황청의 신뢰를 쌓은 것은 '대립 교황' 요한 23세(1370~1419)와의 관계 덕분이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있는 서방 교회의 대분열(1378∼1417) 시기였다. 1409년 피렌체의 종속도시 피사에서 서방교회 전체 공의회가 열렸다. 200명의 주교와 300명에 달하는 대수도원장, 400명이 넘는 신학박사, 유럽의 대다수 군주가 파견한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때 공의회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두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면서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교회의 부패를 일소하는 개혁이 먼저 이루어졌어야 했다. 폐위된 두 교황이 승복하지 않았고, 이제는 3명의 교황으로 분열했다. 이듬해 음모의 달인이자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었던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이 뜻밖에 교황이 된다. 제3의 교황 알렉산더 5세가 일 년 만에 서거하자 그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정통성이 없는 대립 교황이지만, 메디치 은행은 졸지에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될 수 있었다. 횡재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141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재위 1419~1437)의 소집으로 독일 콘스탄츠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렸다. 의장인 지기스문트는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을 포함한 모든 성직자 위에 있다”고 공식 천명했다. 이어 3년간 진행된 공의회는 세 명의 교황을 모두 강제 폐위시켰다. 이번에는 그들도 공의회의 결정을 거역할 수 없었다.
요한 23세는 성직 매매, 남색, 강간 등 16개 혐의로 1417년 하이델베르크 성에 투옥했다. 이때 발을 뺄 수도 있었던 조반니는 요한 23세의 보석금 3만 8000듀캇을 대출해준다. 협상 끝에 그는 석방과 함께 피렌체 추기경을 얻어냈다. 조반니는 그에게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댔으며, 사후 도나텔로로 하여금 그의 영묘까지 만들어주었다. 최초 발다사레 코사에게 보석금을 대출해주자고 건의한 인물이 바로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였다. 적법한 교황 마르틴 5세가 1424년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다시 지명했다. 메디치 가문이 요한 23세에게 보여주었던 신의에 큰 감동을 받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