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와 비슷한 시기 피렌체의 이웃 시에나에서 최고의 화가는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1255?~1318?)이었다. 그는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오히려 북유럽 미술가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조토보다 뛰어났다. 그는 중세 말 인본주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미술, 즉 '국제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시에나 화파를 창시했다. 조화, 섬세함, 그리고 선명한 색상 등이 시에나파의 특징이다. 두초의 제자로 추정되며 시에나파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4?~1344)다.
위대한 시인 페트라르카의 친구인 그가 시에나 성당의 제단화 <수태고지>를 그렸다. 시에나의 수호성인 안사누스(왼편 종려나무 가지와 부활의 깃발을 든 인물)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유럽에서 그리스도의 책형과 성모자와 함께 가장 오래된 주제이다. 그리고 다시 수태고지는 세 단계로 나뉜다. 천사의 방문에 놀라는 마리아, 수태하리라는 말을 듣고 당혹스럽고 두려워하는 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이를 수긍하는 마리아다.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수많은 화가들이 각각의 단계를 그렸는데, 마르티니의 작품은 두 번째 단계를 택했다.
전체적으로 값비싼 금세공사의 작품처럼 보인다. 이 역시 국제고딕 양식이며, 귀족적인 우아함과 고상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중세의 구성을 따랐으며, 사물의 실제 형상과 비례를 무시하고 상징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중앙 아치에 날개 달린 천사들이 성신(聖神)의 상징인 비둘기를 에워싸고 있다. 자칫 문양으로 여길 수 있다. 그 오른편 아치 밑에는 상아로 장식한 금박 옥좌에 망토를 걸친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다. 왼편 큰 날개를 가진 가브리엘 천사가 무릎을 꿇고 성모에게 '성령으로 잉태하리라'는 사실을 전한다. 재밌는 점은 ‘수태고지’하는 말이 금박을 입힌 글자의 모양으로 천사의 입에서 나와 성모의 귀로 전달된다. "아베 그라티아 블레나 도미누스 테쿰(두려워 마라. 은총을 가득 받은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별도의 설명을 필요 없으리라.
다만 두 가지 본질적인 질문은 함께 생각해 볼 만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왜 올리브 가지냐?”와 "성모가 든 책이 과연 성경이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수태고지에서 등장하는 꽃은 통상 ‘범접할 수 없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이다. <구약성경>에서 아름다움, 다산, 영적인 꽃으로 언급하며, 동정녀 마리아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런데 백합은 공교롭게도 피렌체를 상징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서로 자주 전쟁을 벌이던 독립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 시에나와 피렌체는 오늘날 중부 토스카나주 지역의 패권을 다투었던 앙숙이었다. 따라서 시에나에 뿌리를 둔 그가 이곳 성당 제단화에 천사가 백합을 들어 피렌체의 영광을 구현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백합을 아예 배제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냈다. 먼저 화병에 백합을 넣었다. 그리고 천사의 손에 ‘하느님의 평화’와 시에나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쥐여주었다. 올리브는 노아가 방주에서 보냈던 비둘기가 뭍에서 물고 온 ‘구원, 희망’의 꽃이다.
다음, 성모가 든 책과 관련해서 곰브리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은 의심 없이 (구약) 성경 혹은 기도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르티니의 다른 프레스코화의 기도서는 푸른색이다. 그런데 작품 속 8절지 큰 책은 자주색이다. 한편 성모가 성경 혹은 기도서를 들었다고 하면, 성령이 전하는 말씀에 처음부터 순종적이었다는 의미와 통한다. 그러나 작품 속 성모의 자세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질문하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턱밑 망토를 꼭 잡고, 몸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천사와 일정 거리를 둔 채 천사의 눈이 아니라 입에 고정되었다. 결정적으로 성령의 말씀을 듣는데 있어 책갈피를 한 왼손 엄지손가락을 그대로 둔 것은 오히려 반항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성모가 읽고 있던 책을 다른 지혜의 서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럼, 지혜의 확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잉태에 대한 성모의 결심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과 맞아떨어진다. '처녀의 잉태', 처음엔 두렵고 의심을 품었어도 결심이 단호해야 한다. 그래야 이후 성모에게 벌어지는 엄청난 고통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이것이 진정한 인본주의다. 물론 조토 이전에는 예술가들에 관한 자료가 없다. 그들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장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바사리의 미술가 전기가 소중하여, 그가 동향 피렌체 출신 조토의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충정도 이해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회화 역시 중세로부터 양분을 흡수하여 태동한 양식으로 보아야 사리에 맞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시모네 마르티니를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