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 <신문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1886년 여든여덟 살 일기로 사망하면서 유산 2만 5,000프랑을 아들 폴 세잔에게 물려주었다. 덕분에 마흔아홉 살이 된 세잔은 비로소 금전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엑상프로방스(엑스)에서 모직 모자 판매상이자 수출업을 기반으로 자수성가한 은행가였다. 아들이 자기 은행을 물려받거나 변호사가 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세잔은 화가의 길을 택했다. 파리로 떠난 그는 최고 명문 에꼴 데 보자르 입학을 꿈꿨으나 1861년 9월 시험에서 떨어진 채 엑스로 돌아왔다. 본능을 못 이기고 다시 파리로 떠난 세잔은 아카데미 쉬스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규칙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매월 생활비 125프랑을 지원했다.
그러나 세잔은 살롱전에서 낙선을 거듭했고, 1866년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 활동했다. 아버지 눈치가 보이던 이때 자신에 관한 글이 신문에 실렸다. 그리고 그 신문은 짐작대로 <화가의 아버지>가 손에 든 ‘레베느망 지(L' Evénement紙)'다. 진보적인 ‘르 피가로’의 사장 앙리 드 배유메상이 새로 창간한 일간지다. 아들의 고향 친구 에밀 졸라(Émile Zola)가 서평 담당으로 있으면서 <나의 살롱>의 서문 '내 친구 세잔에게’를 통해 두 사람의 10년 우정을 과시했다.
“나는 나의 기쁨과 고통 속에 항상 자네가 있음을 보았네. 그렇게 긴밀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서로 키워왔지···· 우리는 충격적인 사상들을 뒤적이고 모든 이론을 검토하고 거부했으며, 그런 질긴 수고 끝에 강력하고 개인적인 생활을 제외하면 단지 기만과 어리석음뿐이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자네는 내 청춘의 모든 것!”이라는 졸라의 현란한 글에 세잔이 감동했다. 그 화답으로 아버지로 하여금 바로 자신의 정물화 아래에서 자세를 취하도록 부탁했다. 공화파의 ‘르 시에클’을 읽던 아버지가 어색한 듯 ‘레베느망’ 제호를 보여준다. 세잔은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찍어 발라 대형 초상화(200x120cm)를 완성했다. 쿠르베의 마티에르(matiere) 기법이다. 아카데미 쉬스 출신 미술가들 모두 쿠르베의 사실주의를 지지하고, 마네의 그림에 대해 열렬히 토론할 때였다. 몇 년 후 같은 의자에 앉은 <아시유 앙페레르의 초상>과 비교하면, 짧은 시기에 화풍에서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 쉬스에서 함께 수학했고, 매우 존경했던 인물을 표현하면서 피사로에게 배운 작풍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이 초상화 <신문을 읽고 있는 화가의 아버지>를 기준으로 근대 회화의 전과 후를 구분한다.
화가의 아버지는 엄했다고 전해진다. 절제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다. 또한 아들을 꼬드겨 화가의 길을 권유한 졸라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다. 직접적인 표현은 못 했지만, 아들의 성공을 누구보다 기원했으리라. 그래서 생활비를 지원했고, 까탈스러운 화가 아들이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모두 사랑의 표현이다. 세잔도 이때 아버지의 초상을 몇 점 더 그려 나름 효도했다.
그러나 살롱 전시평의 특집 기사를 맡은 졸라의 기사는 예상보다 늦었다. 세잔이 엑스 대학 법학과를 때려치우고 파리 유학을 결심케 한 인물이 졸라였다. 엔지니어인 장 바티스트 바유와 함께 세 사람은 부르봉 학교(현재 미네 고등학교)의 추억을 공유한 단짝 친구다. 졸라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데다 병약했고, 지독한 근시여서 자주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럴 때마다 힘세고 덩치가 큰 세잔이 도와주었다. 졸라는 세잔이 그림뿐 아니라 가슴으로 시(詩)를 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유달리 심사위원에게 가혹하게 시달렸던 세잔에 대해 그간 일절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의외였다. 소심했던 친구가 ‘에꼴 데 보자르’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살롱전에서도 연이어 떨어지자 그 미래를 어둡게 본 모양이다.
"폴은 위대한 화가로서의 재능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위대한 화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사소한 장애물에도 좌절하기 때문이다."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폴 세잔>)
졸라는 <목로주점(1877)>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1878년 세잔은 살롱전에서 또다시 낙선했다. 설상가상으로 수집가 빅토르 쇼케가 세잔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부친이 동거하고 있던 오르탕스 피케와 아들 폴의 존재를 인지했다. 세잔은 부인했지만, 생활비가 200프랑에서 100프랑으로 줄었다. 졸라가 거의 1년 가까이 마르세유에 사는 친구의 가족을 부양했다. 하지만 세잔은 이듬해 살롱전에서 다시 낙선한 후 메당에 있는 졸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호화로운 생활을 목도하자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세잔이 결별을 결심한 시기는 세월이 제법 흐른 1886년 일이다. 졸라의 신간 소설 <작품>이 출간되면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전시회와 화가들의 사적 모임에 함께하며 자료를 모을 당시에는 세잔의 능력과 관련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졸라였다. <작품>을 읽어 본 세잔은 ‘창작에 따른 고통’이라는 주제에 공감하거나, ‘흥미로운 착상’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로 대입시켜 조롱하고, 비극적으로 끝(자살)을 맺었다고 여겼다. 게다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마네를 자신과 비교하여 높게 평가함으로써 자존감을 훼손했다. (제목 그림은 세잔의 <자화상(1880)>
한편 졸라가 지지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마네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에밀 졸라의 초상>을 일찌감치 살롱전에 출품한 바 있다. 입선한 이 그림 속 벽에 <올랭피아>와 자신에게 영감을 준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일본 판화가 걸려 있다. 감사의 깊이가 범상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소설 <작품>은 다른 화가들에게도 졸라가 그간 보여주었던 호의를 의심케 했다. 모네가 대놓고 반발했다. 기유메도 이의를 제기했고, 피사로와 르누아르는 졸라를 피했다. 대인기피증이 깊어진 세잔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대하는 친구의 태도를 확인하고 30년 우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세잔은 1885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후 다시 출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차제 졸라로 인해 더 이상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소설이 출간된 그해 세잔은 오르탕스와 정식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을 동의해준 아버지가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혼란한 정신을 모아 그림에만 집중했다. 더디지만 묵직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반면 세기말인 1898년, 졸라를 ‘행동하는 언론인’으로 만들어 주게 되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드가가 유죄를 편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때 졸라는 1898년 로로르(L'Aurore) 1면에 ‘나는 고발한다!' 제하 기사를 써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반대편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분노한 군중에 의해 그의 인형이 불살라지기도 했다. 이 사건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작가와 지식인들이 개입했다. 역사학자 바버라 터치먼은 드레퓌스 사건을 ‘프랑스 대혁명 못지않은 중대한 위기’로 진단하고, “전 세계가 하나의 사건에 매달린 것 같았다. 내면의 감정과 개인적인 관계, 모든 것이 끊어지고 붕괴했다.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마침내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졸라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1906년에야 드레퓌스를 복위시켰다.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1895년 11월, 쉰여섯 살 세잔은 파리의 앙브루아즈 볼라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동료 화가로부터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때부터 세상은 그를 주목하기기 시작했다. 명망이 하늘을 찌르던 졸라는 생전에 그가 놓친 세잔의 장점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시 화합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1902년 벽난로에서 새어 나온 가스중독으로 인해 졸라가 먼저 사망했다. 세잔이라고 목석이었을까? 친구의 어이없는 죽음과 곧 다가올 자기 차례를 절감하고 쓸쓸해졌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어도 죽음의 문턱 앞에서 드는 생각은 한결같다. 인생무상이다. 3년 후 그도 친구의 뒤를 따랐다. 졸라의 유골은 1908년 팡테옹에 안장됐다. 문득 중국 명나라 말기 명망 있는 학자인 모기령(毛奇齡) 자신이 쓴 비문(碑文)이 생각난다. 삶의 본질을 꿰뚫는 비문은 단 한 문장이다.
“그는 헛되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