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화가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다. 글의 진행상 색채와 연관 지어 쇠라와 고갱을 먼저 언급했다. 그러나 혁신성에 무게를 두면, 세잔을 후기 인상주의의 선두에 소개했어야 옳다. 그는 인상주의와 현대 미술, 즉 야수파와 입체파를 연결해 주는 교량적 역할을 했다. 순간적인 인상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찾으려 관찰과 실험을 끈질기게 계속했고, 그 흔적은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그래서 피카소와 달리 그의 작품은 후반기로 갈수록 가치가 더해진다.
세잔은 정체성을 찾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가장 많은 혹평을 받은 이가 바로 세잔이었다. 논란을 일으켰던 마네의 <올랭피아(1863)>를 지지하는 의미로 <모던 올랭피아>를 출품했다. 그는 3년 전에도 같은 이름으로 서툰 그림(1869~1870)을 그린 바 있다. 이 두 번째 버전은 미묘한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검은 피부의 하녀가 침대 위에서 여인을 덮고 있는 얇은 천을 확 걷어 올린다. 그러자 진열된 상품을 보이듯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난다. 그 앞엔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안 보이던 남성이 등장한다. 세잔의 모습을 닮았으나, 색(色)을 탐하는 일반 남성을 대변할 수도 있다. 그는 아편 연기 속에서 여인의 관능을 탐닉한다. 대중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세잔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훗날 고흐를 치료하게 되는 가셰 박사가 1873년에 이 작품을 샀다. 세잔에게는 최초의 작품 판매였다. 오베르에서 함께 지냈던 가셰는 세잔이 피사로를 만나 놀랍도록 자유로워진 붓 터치와 눈부신 색채로 그린 오른편 빛나는 꽃다발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가 엇갈렸다. <르 샤리바리>의 기자 루이 르루아가 이 그림을 봤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유치한 벽지만도 못하다”고 했던 그였다. 그는 “세잔의 작품에 비하면, 마네의 작품은 소묘나 예리함, 마무리에서 걸작이다”라고 비웃었다. <라르티스트> 지의 평론가는 세잔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 광인’으로 묘사했다.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폴 세잔>) 정작 비교 당사자인 마네 역시 전시회에 세잔을 초대한 데 반발하여 출품하려던 작품을 철수했다. 그는 세잔을 ‘모종삽으로 그리는 미장이’라 평가했다.
다행히 화가로서 그는 느렸지만, 담대했다. 세잔은 피사로의 겸허함에서 ‘통찰의 열쇠’를 발견했다. 인상주의 첫 전시회 함께 출품한 <오베르에 있는 목매단 자의 집(1872~1873)>이 도리아 백작에게 300프랑에 팔림으로써 가능성을 발견했다. 세무서 감사관이자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가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을 한결같이 자신을 응원하는 피사로가 곁에 있었다. 그에게 소개받은 물감 제조상 탕기 영감이 물감과 캔버스를 그림과 바꾸어 주고, 화상 볼라르가 전담으로 그림을 팔아주면서 재정적 형편이 점차 나아졌다.
위대한 화가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버지의 유산이었다. 세잔은 돈에서 벗어나자 오직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잔은 당뇨와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곳에서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유명한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을 남겼다.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높이 1,000m의 평범한 산이다. 그러나 세잔이 1877년부터 15년간 총 열여덟 작품을 그린 이후 세계인에게 ‘영감을 주는 산’으로 거듭났다. 세잔은 유화와 수채화를 막론하고 대략 60회 이상 반복하여 산을 그렸다. 초기 1887년과 후기 1906년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그가 자연의 원형을 찾으려 했다는 의미를 가늠할 수 있다. 레 로브 언덕 소나무 아래 앉아 아크 계곡을 바라보면서 세부 묘사를 생략하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었다. 1904년 에밀 베르나르에게 자신의 탐구 결과를 전했다.
“자연의 형태를 원통, 구(球), 원뿔 모양으로 단순화시켜라.” (피에르/아르노 코르네트 드 생시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모든 사물의 본질에 남아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적 요소를 제시한 것이다. 원근법이 무너졌다. 대상의 순간적 인상에 천착했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결과였다. 색채도 마찬가지다.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은 세잔은 순간적 색채를 포착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났다. 빛은 대상의 본연의 색을 전달하지 못한다. 빛의 굴절에 따라, 뇌 작용에 따라 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결국, 색을 재창조했다. 전체적으로 윤곽선을 명확하게 하되, 동일한 계열의 색조를 통합했다. 그러고나서 색채의 대비를 강하게 혹은 부드럽게 배열했다. 가까이에 빨간색, 멀리는 파란색, 그리고 중간은 노란색 계열을 선택했다. 형태에서 대상의 조형성이 강조되었다면, 색채에서는 작가의 주관성을 표현했다. 모두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다.
이런 혁명적인 시도는 <목욕하는 사람들>과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연작 등 인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고갱,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후대 작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피카소가 서슴없이 세잔을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 했다. 앙리 마티스에게 “네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세잔"이라고. 따라서 형태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피카소의 입체파에, 색채에 관한 주관적 해석은 야수파에 영향을 주었다. 이어 그의 영감을 극단적으로 확대하자 ‘현대미술의 꽃’ 추상으로 진화했다.
세잔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40년간 유행이 지난 정물화에 강박증 같은 집착을 보였다. 모두 200여 점을 그렸다. <사과와 오렌지>가 그중 대표작이다. 첫 개인전을 연 쉰여섯 살에 작업이 시작되어 5년 만에 완성했다. 테이블과 벽면의 입체성을 무시했다. 사선 그리고 길게 늘어진 테이블보는 밑으로 쏟아질 것 같아 불안정하다. 시선 처리를 위에서 아래로 왼편 접시 위 과일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측면에서 바라보는 과일로 꽉 채워서 안정성을 보완했다. 테이블보와 접시의 하얀색이 과일을 도드라지게 했고, 입체감은 검은색 대신 농염이 다른 색을 중첩하여 표현했다. 이런 의도적인 구도와 색채는 기존의 정물화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중 회화사의 중요한 관점은 과일을 바라보는 복수의 시선 처리이다. 훗날 이 기법은 다양한 각도에서 분절된 시선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입체파의 기본적 특징을 이룬다.
그는 꽃 대신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려 했다. 그림 그리는 속도가 매우 느린 그에겐 금세 시드는 꽃보다는 쉽게 썩지 않는 사과가 제격이다. 그는 모델에게도 사과와 같은 인내를 요구했다. 그러나 1900년 베를린 개인전에서는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당뇨병이 악화하면서 몸이 약해지던 1906년 10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강한 비바람에 쓰러졌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우편배달부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실려 왔다. 그러나 며칠 후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산으로 나갔다가 폐렴이 심해져 마침내 눈을 감았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좇던 화가의 외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사후 젊은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보러 줄리앙 탕기(Julien Tanguy, 1825~1894)의 화방에 모여들었다. 1877년 이후 그의 작품은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907년, 파리에서 열린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화단의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작품이 아니라 그림이 만들어지는 방식으로 위대함을 인정받았고 결국, 우상이 되었다. 사과로 파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했다.
세잔은 격동기를 살았다. 그러나 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냈으며, 프로이센과 전쟁 중 날아온 징집영장도 무시했다. 공화정 때도 그는 그림밖에 몰랐다. 하지만 현실에 눈을 감았다고 세잔을 일방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자신의 관심을 온전히 몰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Gustav Le Bon) 역시 제삼자의 눈으로 혼란한 프랑스 정치 상황을 관찰했다. 그 결과, “군중에게도 심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황토라 하여 세상은 노랑꽃만 피지 않는다. 빨강, 파랑 등 온갖 색이 노랑과 어울려 제 모습을 자랑할 때 비로소 세상은 아름답다. 세잔이 있어서 인류의 문화사는 힘차게 한 발짝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