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피사로가 “자신의 감정과 이해 방식에 어울리는 것들만 받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자네의 기질에 적합한 자연을 찾으라”고 한 충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야만과 원시에 대한 동경을 끄집어냈다. 어려서 <르 나시오날> 신문 정치부 기자로 공화파 지지자였던 아버지 클로비스를 따라 페루로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항해 도중 동맥류 파열로 죽어 스페인 귀족 가문 출신 어머니 알린 샤잘과 함께 리마에서 자랐다. 1855년 파리로 돌아왔으나 자신에겐 잉카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1865년 선원이 되었고, 1870년 보불 전쟁 때 알제리 전투에 참여했으며, 1887년엔 파나마 운하 공사판에서 일했다.
고갱은 노란 집을 떠났을 때 마다가스카르로 가려했다. 그러나 문명 세계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자 행선지를 타히티로 바꿨다. 당시 타히티는 오세아니아의 프랑스 식민지로, 팸플렛에 많이 소개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유럽 밖의 세상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피에르 로티의 소설 <결혼>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피오렐라 니코시아, <고갱>)
타히티 생활을 위한 경비가 필요했다. 1891년 2월 23일 경매에서 수수께끼 같은 그림 <순결의 상실> 등을 팔아 총 9,350프랑을 벌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제 홀가분한 기분으로 4월 4일 저녁, 리옹 역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떠나기로 한 베르나르가 배제되었다. 고갱 단독으로 경매를 진행했고, 피사로 등의 부탁으로 게제된 평론은 고갱만 과장하여 부각했다.
베르나르는 '상징주의적 종합주의'를 위한 노력이 간과된 채 자기 작품이 고갱의 아류로 취급받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던 차였다. 누이 마들렌이 고갱을 심하게 비난했다. 윌리엄 서머셋이 쓴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고갱이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그런데도 그의 평가는 폄하되지 않았다. 이후 고갱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추상성이 더욱 짙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63일간 여행 끝에 1891년 6월 8일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 도착했다. 그러나 포마레 왕의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오염된 유럽의 문명을 모방하려는 값싼 속물근성을 마주하곤 크게 실망했다. 1521년 마젤란 탐험 이후 태평양의 섬에 상륙한 첫 번째 식민지 개척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인이었다. 타히티는 1606년에 발견되었고, 1700년대 초에 체계적인 탐험이 이루어졌다. 그중에는 프랑스의 루이 앙투안 부갱빌과 1768년~1779년 세 차례 항해했던 영국의 제임스 쿡이 있다.
코코야자, 면, 커피, 사탕수수 농장이 개발되던 그곳 문화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타히티관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해 트로카데로 궁에 민속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민들이 접할 수 있었다. 1900년 당시 유럽 제국들은 아프리카의 90.4%, 오세아니아의 98%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고갱>)
고갱은 주민과 동화하려 애썼으며, 그럴수록 문명에서 점차 멀어졌다. 강렬한 햇빛 아래 알록달록한 원시의 색에 관심을 집중했다. 몇 달이 지나 식민지 영향을 덜 받는 마타이에아에서 13살 새 신부 테하마나(테후)를 만나 안정되면서 제법 마음에 드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이상과 현실, 작품 세계가 잘 드러난 <이아 오라나 마리아>가 그것이다.
하단에 타히티 언어로 쓴 작품 제목이 뚜렷하다. ‘아베 마리아’라는 뜻으로 “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단순하게 “안녕하세요, 마리아”가 훌륭하다. 원시를 무대로 성경의 장면을 묘사했다. 배경을 이룬 마타이에아 주민들이 다른 곳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였던 점이 작용한 듯싶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성모 마리아와 목말을 태운 아기 예수 머리에 후광이 나타난다. 그 왼편으로는 전통의상 ‘파데우(꽃무늬 무명치마)’를 허리에 두른 원주민 여인 두 명이 두 손을 모아 성모자에 경배한다. 열대 우림과 뒤섞여 알아보기 힘들지만, 더 왼편에는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있다. ‘원시’와 기독교 도상이 서로 얽혀 있는 문명의 중첩이다.
서양 문명에서 ‘순수, 순결’을 대표하던 성모에 대한 재해석으로, 그 근원을 원시의 처녀성에서 발견했다. <설교 후에 환영>과 <순결의 상실>에서 보여준 상징주의 방식으로 접근했으나 선과 굴곡은 우아하며 색채는 감미롭고 부드러워졌다. 보라색 땅과 특히 전경 바나나의 색채는 다양하면서도 임의적이다.
이곳에서 그린 다른 작품으로는 전통 의상과 서양식 분홍 원피스가 충돌하는 <타히티의 여인들(1891, 제목 그림)>, 평론가를 아연실색케 했던 주황색 개가 등장하는 <아레아레아(즐거움, 1892)>, 이름이 재밌는 <아하 오에 페이(어머! 너 질투하니)>, 이 섬의 오염되지 않았던 시대를 그린 <마타무아(옛날 옛적에, 1892)>, 그리고 테후가 누드로 침대에 엎드린 <마나오 투파피오(망자의 혼이 그녀를 기억한다, 1892)>가 유명하다. 제목은 고갱이 마오리족 언어를 배워 붙인 이름이다.
고흐의 팬들에 의해 이미지를 많이 훼손당했지만, 고갱의 미학이 현대 미술에 던진 충격은 대중의 생각 이상이다. 그가 ‘원시’라는 주제에 도전한 이후 원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미술가들이 연이어 나왔다. 나비파는 물론이고 표현주의자 막스 베크만은 그의 목판화에서, 피카소는 마르케사스 제도에서 그린 고갱의 그림을 공부했다. 앙리 마티스의 소장품에는 고갱의 <티아레 꽃을 꽂은 여인>이 있었다. 파울 클레, 장 뒤뷔페, 막스 에른스트, 콘스탄틴 브랑쿠시,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선망으로만 이룰 수 없는 경지이며, '경외'의 차원이었다.
그러나 타히티 생활은 꿈처럼 깨졌다. 돈이 없어 캔버스와 물감이 떨어졌고, 코펜하겐에서 열린 근대미술 전시회에서 자기 작품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893년 2월에는 자신을 끝까지 응원했던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의 오리에가 사망했는 소식을 들었다. 고독했다. 결국, 6월 타히티를 떠나 8월 30일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이때 인상주의 동료 화가 중에서는 <테 파투루마(토라진 여인, 1891)>를 산 드가만이 곁에 있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단순히 못 그린 그림’으로 깎아내렸고, 피사로는 색조가 사실과 닮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고갱은 들라크루아가 말을 보라색으로 그려 넣은 적이 있었다며 “색의 사용은 화가에게 권리가 있다”고 응수했다. (존 리월드, <후기 인상주의의 역사>)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의 반응도 냉담했다. 파리엔 그가 설 자리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했고, 화단에서는 자신을 추종했던 나비파가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는 상징주의를 인도했고,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은 로댕의 조각에 매료당했다.
1895년 2월 19일 작품 49점을 내놓은 드루오 경매는 실패였다. 10점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해 9월, 유럽과 완전히 결별하고 타히티에 다시 도착했다. 마흔일곱 살 고갱은 빈털터리였고, 병까지 얻은 상태였다. 마지막 8년간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다. <에이아하 오히파(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1896)>와 대작(347x139.1cm)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완성했다.
이 대작은 그의 유언과도 같다. 1개월간 미친 듯이 밤낮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오른편 어린 시절에서 왼편 노년기까지 인생을 제목과 연계하여 세 단계로 담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하얀 새는 죽음을 상징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에 죽음을 앞둔 늙은 여인은 막상 길 떠나기가 두렵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명상과 상징성을 자연과 종교에 대비했다. 사실주의적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질문만 있지, 답은 없다. 그것은 보는 이의 몫이다.
“(친구 몽프레에게) 이 작품은 내가 지금껏 그린 작품 중 최고이고, 앞으로도 이것과 비교할 만한 작품을 그릴 자신이 없네.”
작업 중 그는 코펜하겐에 남겨둔 딸 알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알린을 위한 노트>를 헌정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 1898년 2월, 그도 목숨을 끊으려 산속에서 다리 습진제로 모아두었던 비소를 삼켰다. 하지만 실패했다. 고갱은 생활인으로서 무책임했고, 무능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에 매진했고, 원시로부터 추상을 끌어낼 것을 충고했다.
1903년 5월 8일 오전, 옮겨 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섬에서 늙은 마오리족 주술사 티오카와 개신교 목사 베르니에가 곁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심장마비로 죽었다. ‘쾌락의 집’으로 불렸던 자신의 오두막에서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다. 역시 이중적이었다. 파리의 주식 중개인 그가 어떤 운명으로 화가가 되었을까? 그 삶에 진정 만족했을까? 그리고 고흐와 저세상에서 만났다면, 잘 지내고 있을까? 이것이 대중이 지금도 그에게 던지는 질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