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색채와 상징주의 ‘나비파’

by 노인영
폴 세뤼지에의 <부적(1988)>

1888년,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 퐁타방의 클로아네크 하숙집에서 여름을 보내던 폴 세뤼지에(Paul Sérusier, 1863~1927)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에게 지도받고 싶었다. 그러나 고갱이 이질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망설였다. 베르나르의 독려를 받은 세뤼지가 체류 마지막 날 마침내 소망을 달성했다. 고갱은 색채에 자신의 주관을 반영한 화가다. ‘사랑의 숲’에서 그가 세뤼지에에게 물었다.


“이 나무들이 어떻게 보이나?” “노랗지. 좋아, 노랗게 칠하지. 그림자는 좀 더 파랗게, 그렇게 맑고 깊은 바닷물 빛이 되게. 저 붉은 잎사귀들은 주홍을 쓰게나.”


추상 미술의 선구자 세뤼지에는 이렇게 시가 담배 상자 덮개에 가을 풍경을 담은 <부적>을 완성했다. 그해 10월, 파리로 돌아간 그는 ‘아카데미 쥘리앙’의 친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새로운 예술에 관해 토로했다. 친구들이 봐도 이전 그의 그림과는 달랐다. 인상주의와 같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었다. 풍경에 작가의 주관이 개입한 ‘지적인 풍경화 기법’의 등장이었다.

친구들은 그들이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발견했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원래 작품명 <부아다무르의 풍경>을 고쳐 불렀다. 자신들의 미래를 밝혀 준다는 의미에서 <부적>이라고 했다. 이듬해 세뤼지에를 비롯하여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펠릭스 발로통, 폴 랑송 등이 모여 ‘나비파’를 결성했다. 제2세대 상징주의 화가들로, 히브리어 ‘예언자’를 의미하는 ‘나비(Nabi)’이다. 나비파란 이름의 탄생에는 두 가지 견해가 상존한다. 이들 그룹 중 한 명인 시인 앙리 카잘리스가 이름을 붙였다고도(가브리엘레 크레팔디, <고갱>) 하고, 세뤼지에가 퐁타방에 있을 때 고갱과 함께 지었다고도(<WikiArt>) 한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고갱의 <백마(1898)>

1870년대 말부터 상징주의 풍경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세대 상징주의 화가로는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를 선두로, 문학가로부터 주목받은 퓌비 드 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문학에서처럼 회화에서도 “자연의 재현은 나태한 공상”이라고 규정했다. 자연을 점점 더 지적 작업화 했다. 고갱은 ‘상상’으로, 뭉크는 ‘기억’으로 그렸다. '상상'으로 그렸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작품이 <백마>이다. 그는 이 그림과 관련,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파르테논의 말보다도 더 멀리,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갔다. 내 어린 시절로까지.” (니콜 튀펠리, <19세기 미술>)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를 모방한 작품 속 붉은 말, 푸른 물속의 오렌지색 그림자는 그의 상상의 세계에서 드러난 색채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색이 상상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은 화가였다. 이로써 고갱은 색채 사실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개의 인상주의자는 상징주의자들과 교류가 없었다. 피사로, 쇠라, 시냐크 등이 그들이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에 관해 공개적으로 공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고갱, 고흐가 퓌비 드 샤반을 존경하는 정도였다.

고갱이 상징주의, 나아가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 불리게 된 데에는 <설교 후 환영>이 있다. <야곱과 천사의 싸움>이라고도 불린다. 선과 색채를 조화하면서도, 기존의 형상과 색채를 벗어난 작가의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구도가 단순하다. 가로지르는 사과나무 굵은 가지가 화면을 대각선으로 크게 이등분했다. 왼편은 현실이고, 오른편은 성경이 배경이다. 고갱이 퐁타방에 머물 때 교회에서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설교 후 환영(1888)>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교의 결과로 나타난 풍경과 씨름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방식으로 그려진 윤곽선 안에 각각의 색깔과 형태를 담고 있는 ‘클루아소니슴(cloisonnisme)’ 기법이다. 인상주의 작품과는 달리 광택이 없고, 보완적 색채들을 서로 반대로 놓거나 겹쳐 그렸다. 현실과 다르게 바닥에 붉은색을 썼고, 명암이 없으며, 인물 크기와 비례에서도 작가의 내면적 흐름에 충실했다. 작품의 평면성, 즉 기존의 원근법을 무시하고 회화임을 솔직히 밝히려는 시도이다. 마네의 작품에서 일부 발견되나 사실주의나 인상주의에 없었던 새로운 도전이었다. 고갱은 수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림이란 말, 혹은 여성의 나체, 혹은 다른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기 이전에 특정한 순서로 배합된 색채로 덮여 있는 평면일 뿐이다.”


<설교 후 환영>은 야외에서 벗어나 시각과 환상적 체험을 아우른 작품이다. 브르타뉴 여성들이 입은 전통의상에서 나타난 흰색과 검은색은 신앙의 경건함과 신성함을 강조했다. 완성된 작품을 나종의 오래된 성당에 기증하려고 했다. 투박한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사이에서 작품이 어떤 효과를 낼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갱이 예술적으로 장난한 것은 아닌지를 두려워한 신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고갱의 새로운 시도에는 퐁타방에서 서로 영감을 주고받던 에밀 베르나르의 영향이 컸다. 그는 고갱보다 스무 살, 고흐보다는 열다섯 살 아래였다. 하지만 끝없이 독서하고, 시를 짓고, 철학과 예술론에 젖어 주변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고흐의 스케치를 보고 유치하다고 지적하는 방자함과 세잔의 초기 작품에서 가능성을 예견하고 찬사를 보내는 안목이 있었다. 두 사람은 1888년 초 고갱이 두 번째로 퐁타방에 머무를 때 베르나르가 찾아와 처음 만났다. 고갱은 고흐가 이 청년의 작품이 "신중하고 예민하며, 견고하고 자신감에 찬 것"이라고 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와 자주 토론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농민 예술,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고갱 베르나르의 초상화가 있는 자화상 레 미젤블 1888.png
고흐 폴 고갱을 위한 자화상 1888.png
고갱과 고흐의 <자화상(1888)>

고갱과 고흐, 그리고 베르나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886년 11월 고갱이 브르타뉴를 떠나서 파리로 돌아왔을 때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를 알게 되었다. 고흐는 고갱이 처음 퐁타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을 보고 찬사를 보냈다. 고갱 역시 ‘우키요에’에서 받은 영감을 캔버스로 옮기고 있을 때로, 고흐에게 호감을 느꼈다. 둘은 편지로 대화를 계속 이어가던 중 고흐가 퐁타방에서 함께 있던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초상화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 역시 일본 화가들의 관례를 흉내 낸 제의였다.

고갱이 <레 미제라블>이라고 이름 붙인 <자화상(1888)>을 고흐에게 보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속 주인공 장 발장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 발장은 평판이 나쁘고 세상을 위해 언제나 쇠사슬을 매고 다니는 인상주의 화가를 육화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상단 오른쪽에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들이 생각하는 공동체에는 베르나르가 포함되었다는 의미다.

고흐도 미리 그려 놓았던 일본풍의 <자화상(1888)>을 보냈다. 고흐는 <해바라기 열네 송이>에서 사용한 청록색을 사용했고, 자신의 짧은 머리를 그렸다. 일본의 승려처럼, 그리고 일본인처럼 보이게 눈초리가 약간 올라간 모습이다. 그러나 두 사람 역시 아를 노란 집에서 2개월 정도 함께 지냈지만, 서로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빚었다. 1903년 고갱은 죽기 직전 빈센트와 같이 지냈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몇 주가 지나고서야 나는 아를과 그 주변의 매서운 맛을 제대로 알았다. (···) 우리 둘에 말하자면, 하나는 끓어오르는 화산 같았고, 다른 하나는 소용돌이치는 존재였다. 어떻게 보면, 싸움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피오렐라 니코시아,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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