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불꽃같은 삶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by 노인영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PNG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작은 램프에 의존한 낡은 집 실내 풍경이다. 볼품없는 들창코에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와 쫑긋한 귀를 한" 인물들이 모여 식사하고 있다. 감자밥에 감자 반찬이다. 다른 이들의 포크가 소금 간을 한 감자로 향한 가운데 오른편 여성이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른다. 곁에 있는 사내는 차를 더 달라는 듯 여인에게 잔을 내민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기 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초기 작품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집안의 반대로 세 번째 여인 클레시나 호르닉(시엥)과 헤어진 직후의 작품이다. 그녀는 고흐보다 세 살 많았고, 다섯 살짜리 딸을 키우는 매춘부였다. 그는 "색채에 주의를 집중하느라 몸통 형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리와 손은 매우 정성스럽게 그렸다"고 고백했다. 그가 생각하는 (습작이 아닌) '첫 작품'이었다. 그의 특징적인 강력한 붓 터치나 색조가 발견되기 전이다.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다. 틀에 박힌 듯한 농부들의 온화함을 배제했다.

그러나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호롱불 희미한 빛에 의한 색채의 배합, 즉 보색 효과에 관한 그의 탐구와 윤곽선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암갈색이 주조를 이루며, 분위기가 무겁다. 그동안 작업한 것을 하나하나 캔버스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구성에 고민했고, 곡물 색 벽지 위에 걸기를 권했던 작품이다. 내심 그가 존경한 밀레와 한번 겨뤄보려는 야심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남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민중 미술'의 저항성과는 결을 달리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강한 연대감과 함께, 정직한 노동으로 '그들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음'을 환기한다.


“나는 등불에 의지해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지금 그 손으로 땅을 파서 감자를 캤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신성한 노동이고 정직하게 얻은 식사였다."


감자는 가난한 소작농에게 축복이었다. 별도의 장비 없이 땅을 깊이 파지 않아도 잘 자란다. 빵과 달리 조리법도 간단하다. 고흐가 소망하던 삶과 닮았다. 거칠고, 투박하고, 그러나 든든한 양식이 되는 그런 작물이다. 당시 유럽 북부에서는 흉작이 거듭됐다. 프랑스는 1775년부터 식량 부족이 만성화되기 시작하여 1885년에는 대한발까지 찾아왔다. 평균 물가상승률은 65%, 소작료는 1776년~1789년까지 98%가 올랐다.

유럽에서 감자는 아일랜드의 대표 작물이었다. 남미에서 보급되어 아일랜드가 가장 먼저 재배했다. 그곳에도 1845년부터 대기근이 찾아왔다. 1850년까지 인구 800만 명 중 100만 명 이상 사망했다. 외형상 원인은 감자 역병에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인 지주의 착취에 있었다. 결국, 그들은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타야만 했다. 배는 너무 허술해 그야말로 죽음의 항로였다. 감자는 이렇게 가난한 이들의 슬픈 역사와 함께한 구황작물이다. 고흐는 그림의 기법보다 소재를 중요시했다. 그런 그가 감자 먹는 이들의 웃음을 그렸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고흐가 되지 못했을 거다.


안트베르펜을 떠나 파리에 도착한 빈센트는 뒤늦게 인상주의를 접했다. 이전까진 그에게 현대 미술은 바르비종파가 대표했다. 1875년 밀레가 사망한 뒤로는 예술이 전반적으로 퇴조했다고 믿었다. (존 리월드, <후기 인상주의의 역사>) 그러나 검은색을 고집하던 그가 동생 테오의 소개로 만난 피사로 덕분에 변화가 찾아왔다. 피사로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본 후 이 네덜란드 사내의 잠재력을 높이 샀다. 피사로는 빛과 색채의 개념뿐 아니라 쇠라의 보색 이론을 즐겁게 설명했으며, 이때부터 고흐는 풍부한 색채를 모색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자신감의 상실, 그리고 변모하는 작업 환경에 대한 염증 등이 겹쳐 혼란스러웠다. 코르몽 화실에서 사귄 로트레크가 차라리 파리를 떠나 다른 곳에서 작업해 보기를 권했다.

<노란 집(1888)>

결국, 파리 생활 2년을 청산하고 남프랑스로 떠났다. 그리고 색이 풍성한 이곳에서 3년 동안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남프랑스는 세잔, 피카소, 샤갈, 르누아르, 모딜리아니 등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선물한 곳이다. 1888년 2월, 고흐는 아를(Arles)에 도착했다. 하루 5프랑으로 살았다. 이웃 룰랭이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받은 월급이 135프랑이었으니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플로리안 하이네, <화가의 눈>) 하지만 동생이 보내주는 돈이다. 화실도 없는 레스토랑 ‘카렐’ 위층 값싼 방에서 지냈다. 그해 5월 초 유명한 <노란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집의 방 네 개를 매달 15프랑에 임대했다. 고흐는 항상 햇빛이 머무는 집 안을 둘러보고 모처럼 충족감을 느꼈다. 집을 손보면서 카페 ‘알카자르’에서 자고 기차역 근처 마담 지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9월 중순, 드디어 노란 집으로 입주했다.

이때 고흐는 여느 화가 못지않게 색채에 대한 탐구가 깊어 있었다. 집의 창은 진한 초록, 내부는 흰색, 바닥은 붉은 타일을 깔았다. 벽을 온통 버터 빛 노란색으로 덮었다. 서로 다른 열여덟 가지 노란 물감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붓질할 때보다 오히려 더 즐거워했다. 노랑에 관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은 태양이다. 고흐는 태양을 갈망하듯 <해바라기> 연작을 그렸다.

고흐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 1888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png
고흐 열다섯송이 해바라기 1888 런던 내셔널 갤러리.png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1888)>와 <열다섯 송이의 해바라기(1888)>

해바라기는 그리스의 태양신 헬리오스의 애인 클리티아가 변신한 모습이기도 하다. 카드뮴 대신 값싼 크롬의 노랑을 사용하였기에 변색을 염려하여 특히 두껍게 칠했다. 그중 유명한 작품은 뮌헨 노이에 파나코텍에 전시된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와 숫자를 열네 개로 잘못 계산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열다섯 송이의 해바라기>다. 흡족했던 그는 이전 작품과 달리 ‘Vincent’라는 서명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테오가 대준 300프랑으로 가구 몇 점을 샀다. 고갱을 위해 편안한 의자 하나를 별도로 마련했다. 존경심의 발로였다. 이제 고갱이 도착하면, <노란 집>에서 염원하던 화가 공동체 생활이 시작된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강렬한 색채 변화를 함께 즐길 일만 남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다림이었다.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1888)>

고갱은 테오와 매달 150프랑을 보장받고 1년에 12 작품을 공급한다는 계약을 맺은 후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이 2개월을 함께 지내면서 벌어졌던 격렬한 사건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통해 두 사람의 갈등의 이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흐의 내면을 포착한 작품으로, 고갱은 <해바라기>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가 고흐에 대한 그의 본심을 드러냈다.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 살 위다. 자신은 요리 실력만큼 미술 이론에서도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흐리멍덩하게 묘사된 자신을 보고 고흐가 외쳤다.


“정말 나로군. 그런데 미쳐버린 놈이잖아.”


고흐는 간질병을 기본으로 극심한 환각과 공격적 성향을 동반한 경련으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림을 그릴 때에는 증세가 잦아들었다. 따라서 이때 자신이 미친 모습으로 비치는 것엔 불쾌감을 느꼈을 수 있다. 어쨌든 그날 둘은 카페에서 부딪쳤고, 이어 고흐가 귀를 잘라 창녀 라셀에게 건네주는 극단적인 사건이 확산됐다. 둘은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표현기법은 물론 좋아하는 화가와 그림까지 그랬다. 닮은 점은 완고한 고집뿐이었다. 고갱은 이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로맨틱하고, 나는 원초적인 상태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 지독한 다툼이 있고 난 뒤 둘은 결코 다시 만나지 않았다.


고흐의 탐구는 밤의 풍경에서 어둠을 표현하는 색채 선택으로 이어졌다. 동생 테오에게 자신이 체험한 밤하늘을 “밝지도 않고, 음산하지도 않고, 그저 아름다웠을 뿐”이라고 서술했다. 노란 집이 있는 플라스 뒤 포럼에 자리한 카페를 그렸다. 걸어서 15분 거리다. 인공조명과 밤하늘에 있는 별이 뿌려주는 빛이 서로 어우러진 <밤의 카페 테라스(1888년 9월, 제목 그림)>를 그렸다. 지금은 ‘반 고흐 카페’라 불린다. 뛰어난 데생 실력으로 사물의 윤곽을 뚜렷하게 스케치했다. 반면 색에서는 자율성, 즉 자신이 감정에 충실했다. 이렇게 해서 낮보다 훨씬 다양한 색채를 지닌 밤의 풍경이 탄생했다.


“저녁마다 밖에서 카페를 본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커다랗고 노란 등이 테라스와 건물 앞면과 인도를 밝게 비추고, 보랏빛으로 물든 거리를 비춘다. 별이 빛나는 푸른 하늘 아래 뻗어 있는 도로를 향해 나 있는 집들은 어두운 파랑이거나 보라색이다. 집 앞에는 초록의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거기에는 오직 아름다운 파랑과 보라, 초록만이 있을 뿐, 검정을 쓰지 않은 밤 풍경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이 켜진 카페는 창백한 유황색과 싱싱한 레몬 빛을 띤다.” (인고 발터, <빈센트 반 고흐>)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jpg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년 9월)>과 <별이 빛나는 밤(1889)>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도 이때의 작품이다. 9개월 후 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의 등장을 예고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술가 공동체를 꿈꾸던 설렘과 죽음이 대비되는 감정 표현이다. 특히 생레미 근처 생폴드모졸 정신병원 시절 상상력에 의존해 그린 <별이 빛나는 밤>에는 색채에 이어 형태에서도 그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하나는 계속 굽이치는 곡선이고, 다른 하나는 짧고 힘차게 끊어지는 선이다. 극도의 흥분과 긴장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역동성과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부여한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는 철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강렬한 삶의 욕구와 함께 연동되어 나타난다. 아를 사람들이 자신을 강제 격리해 달라는 데서 깊은 상처를 받고, 27km 떨어진 이곳 병원을 스스로 찾아 들어갔다. 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고흐는 이때 삶의 진실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자연의 강한 생명력을 목도한다. 이즈음 완성한 그의 표현 기법은 마지막 오베르 시절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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