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레크가 초대한 1890년 1월, '20인 그룹 정기전'에 고흐가 전시했던 작품이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다. 석양의 노란빛이 멀리 퍼지며 포도밭을 더 붉게 물들이는 장면을 그렸다. ‘붉은 포도밭’은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노란 집’에서 지낼 때 집중한 주제였다. 존경했던 고갱의 영향으로 다른 작품과는 달리 캔버스를 매끈하게 채색했다. 고갱에게서 나타나는 평면성이다. 한편 이 그림은 고흐의 생전에 팔린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친구이자 화가이며, 또 시인인 외젠 보크의 누이 안나 보크가 고흐가 죽기 5개월 전 400프랑(한화 약 100만 원)에 샀다.
때마침 그해 1월부터 그의 화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스 주요 미술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알베르 오리에가 고흐를 '기쁨을 창조하는 위대한 예술가'로, <사이프러스(1889)>를 '악몽 같이 타오르는 검은 실루엣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3월에는 브뤼셀 독립화가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6점이 소개되었고, 네덜란드 신문에 아사크손의 비평도 실렸다. 그러나 고흐는 감사한 일이지만, 과장되었다고 여겼다. 그리곤 1890년 5월 16일 제 발로 찾아가 거의 1년을 머물렀던 아를 인근의 생레미 병원을 떠났다. 그곳에선 두 번 발작을 일으켰지만, 상태가 호전되었다. 갓 태어난 조카 빈센트를 위해 <꽃 피는 아몬드 나무(1890년 2월)를 비롯해 3점의 꽃 그림을 그렸다. 생애 가장 행복감이 넘치는 작품들이었다.
가셰 박사의 치료를 받으며 마지막 2개월을 머문 오베르의 들판에서 <까마귀 나는 밀밭>을 캔버스에 담았다. 파란 하늘이 폭풍우 일 것 같은 검정으로 점령당했다. 그리고 운명에 도전하듯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보지만, 불안감이 엄습한다. 하늘의 구름도, 밀밭도 모두 격렬하다. 스스로 '지독한 슬픔과 고독을 그렸다'는 이 그림에서 그의 죽음과 함께 꿈틀거리는 삶의 의지도 확인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였던 길을 세 갈래로 그렸다. 그의 혼란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890년 7월 23일 테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마지막 편지를 썼다. 이어 27일 1시 30분,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고, 레리성 뒤뜰 까마귀가 깜짝 놀라 하늘을 날았다.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다. 고흐는 피가 흐르는 몸을 이끌고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있던 라부 가족 중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후 3층에서 지독한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그의 정신병을 치료하던 가셰 박사와 지역 의원이 도착했다. 그러나 대체의학을 했던 가셰 박사는 횡격막을 비켜 가슴에 박힌 탄환을 빼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시골 마을 오베르에서는 수술할 수도, 가까운 퐁투아즈까지 이송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흐는 경찰관에게 자신이 총을 쏘았다는 말만 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동생 테오에게 담배를 피우며 겨우 한마디 건넸다.
“또 실패야!" 테오가 흐느껴 울자 한 마디 덧붙였다. "울지 마. 모든 사람들에게 좋자고 한 일이야.”
그리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경 별이 되어 하늘나라로 떠났다. 테오가 순교와 같은 것이라고 했던 그의 죽음을 둘러싸곤 말이 많다. 자살의 원인과 관련해서, 혹은 자살이 아니고 아이들의 오발 사고를 감춰주려 했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그러나 생레미 병원에 들어가면서 테오에게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바 있었다.
“너의 우애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무런 후회 없이 자살했을 것이다. 비겁해진 지금의 나라면, 결국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인고 발터,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편지에서 예전 같지 않았던 테오의 당시 형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테오는 구필 화랑을 이어받은 부소&발라동 상사에서 일했다. 봉급은 작았으나 판매 실적에 따른 수수료로 벌충했다. 뒤랑 뤼엘보다 후한 값으로 작품을 팔아주어 인상주의 화가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1888년에는 모네와 어렵게 계약을 맺었고 피사로, 기요맹, 고갱의 작품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판매상으로 성공하기에 그의 태도는 너무 점잖았다. 상사와 다툼이 생겼고,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좀 더 모험적인 결심이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위로하고, 고흐에게는 미래가 기약된 화가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고흐 입장에서는 의지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번민은 깊어갔으리라. 이때부터 그는 가로가 긴 밀밭 연작에 매달렸다. 피사로는 뒤늦게 그의 죽음에 대해 “나는 이 친구가 미치거나 아니면 우리 모두를 두고 떠날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술회했다. (카린 H. 그림, <인상주의>)
지난 2019년 6월 19일(현지 시각) 고흐가 자살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7㎜ 구경의 회전식 리볼버) 경매 소식이 뉴스가 되었다. 감정가의 세 배에 가까운 16만 2천 500유로(2억 1천 400만 원 상당)에 낙찰됐다. 참 짓궂다. 정작 생전의 그는 하루 집세 3프랑 50전이 밀려 쩔쩔맸고 그림이 50프랑 정도에 팔린다면,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감정에 관한 솔직한 전달과 함께 강렬한 색채와 선이 비극적 삶을 디디고 선 빈센트의 독창성이 되었다. 그는 자기가 죽고 25년 후에야 이름을 남길 것이라고 내다봤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표적인 작가가 뭉크와 베이컨, 그리고 몬드리안이다.
고흐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중 한 가지는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고흐의 강렬했던 작품과 전설은 자칫 사후 6개월 만에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네 살 아래 동생 테오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명성을 온전히 되살려낸 이가 바로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거(Johanna G. van Gogh-Bonger)다. 그녀의 사후 조치는 누구보다 고흐의 생각을 정확히 반영했다. 1891년 1월 25일 남편이 죽은 후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모두 상속받았다. 당시 출판사들은 그녀에게 편지를 엮어 책을 내자고 제의했다. 모두 거절했다. 비극적인 삶의 드라마가 그의 작품을 압도할지 모른다고 염려해서였다.
요한나는 고흐의 편지와 메모 606통을 날짜순으로 정리했다.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각별한 애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나자 그녀의 방향도 선명해졌다. 요한나는 우선 고흐의 그림들을 해외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에 무료로 빌려주었다. 특히 사후 11년이 지난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와 1903년 유작전을 통해 그의 명성이 급속히 확산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부의 몸이었기에 그림 일부를 팔았다. 하지만 매우 신중했다. 긴 망설임 끝에 마지막으로 <해바라기> 15점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넘겼다. 고흐는 런던에서 화상을 했던 시절, 영국이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느꼈다. 따라서 영국 국립박물관에 자신의 그림이 전시된다는 사실에 그 역시 몹시 만족할 터였다. 세 권의 서간집은 고흐가 죽고 24년을 미루다가 1914년이 되어서야 출간했다. 그리고 그해 남편 테오의 유해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빈센트의 무덤 옆으로 옮겼다. 영문판 서간집을 준비하던 그녀는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흐가 1880년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1890년 죽기까지 고작 10여 년, 따라서 그의 회화적 기교는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사랑한다. 뇌에서 해석되기 전에 가슴으로 전해지는 울림 때문이다. 고흐도, 우리도 그의 작품이 우리 곁에 남게 해 준 요한나의 노력에 고마워해야 한다. 해바라기 연작은 그가 소원했던 대로 ‘주황색 틀’ 액자에 감싸여 걸려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온전히 이어받은 아들(테오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빈센트 빌렘 반 고흐가 600여 소장품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했다. 이로써 1973년에 개관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고흐 컬렉션을 구비하고 있다. 200점 이상의 유화, 580점의 드로잉, 네 권의 스케치북과 약 750장의 편지. 고흐가 아꼈던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