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술, 아방가르드

표현주의의 등장

by 노인영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미술 운동은 후기 인상주의 이후, 특히 20세기 초 봇물 터지듯이 속속 등장했다.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추상 미술, 초현실주의··· 이 새로운 미술들을 한 데 묶어 모더니즘 미술, 실험적 미술, 그리고 아방가르드(前衛藝術, Avant-garde) 등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카메라가 등장한 상황에서 '회화의 본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새로운 미술 모두가 ‘기존의 가치를 전면 부정했다’라는 평가가 무리라면, 적어도 기존의 시각 언어로는 한계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산업 문명의 발달 이후 인류의 퇴락과 관련 작가의 복잡한 내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경향의 결정적인 변곡점은 제1차 세계대전이 제공했다.

거짓 선전선동이 증오심을 충동질했고, 대규모 살상력을 갖춘 무기체계가 등장했다. 분당 수백 발을 쏠 수 있는 기관총은 이미 19세기 말에 등장했다. 영국에서 탱크와 폭뢰가 만들어졌고, 독일에서는 체펠린 비행선과 잠수함, 그리고 독가스가 개발되었다. 과학기술이 야만에 종사한 결과로, 이 때문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극도의 회의감이 팽배했으며, 인간의 내면에 꽈리를 튼 ‘자기 파괴성’ 혹은 ‘집단자살 의지’를 드러냈다.


오토 딕스의 <스카트 플레이어(1920)>

1914년 8월 전쟁이 터졌을 때만 해도 유럽인들 사이에는 많은 환상이 존재했다. 크리스마스 경이면 전선에 나갔던 자식들이 집에서 축제를 즐기게 되리라는 기대가 컸다. 자신의 전쟁 수행 능력은 과장하고, 상대는 과소평가한 결과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놀랍게도 동원령이 발동한 것과 관련 절망보다는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파리를 약 69km 앞에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벨기에 그리고 소규모 영국 원정군이 팽팽히 맞섰다. 1915년까지 양 진영은 북해부터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참호를 사이에 두고 지루한 공방전을 벌였다.

새로운 전투 방식 참호전이 전개된 것이다. 참호전은 17세기 네덜란드가 최초 사용했는데 당시 용병들은 굴욕적인 태도라고 치부했다. (마이클 하워드, <유럽사 속의 전쟁>) 그러나 오랜 기간 버틸 수 있는 유효한 방식으로, 이 때문에 전쟁은 장기 소모전으로 진화했다. “군복을 입은 순진한 청년 목동”이었던 영국인 시인 에드먼드 브란덴은 자원입대 후 고뇌했다. 박격포탄과 지뢰, 독가스와 전염병, 우박과 진창으로 채색된 지옥에서 그는 외쳤다.


“살아 있음을 망각하라.” (사카이 다케시, <니체의 눈으로 다 빈치를 읽다>)

막스 베크만, <자화상(1901)>

대중의 폭발적인 열정과 기대, 그리고 분노로 인해 각국은 쉽게 평화 협정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가 네 번이나 지나가면서 전쟁이 끝났다. 승전국조차 피폐해진 그야말로 지구촌의 몰락, 그 자체였다. 급류에 휩쓸린 유럽인의 생각이 복잡하게 엉켰다. 이때 새로운 시각 언어로 등장한 양식이 표현주의다. 이를 ‘병들고 타락한 예술 현상’으로 보는 일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분열의 시대를 표현하는 데는 오히려 분열과 파편성, 그리고 비완결성을 속성으로 가진 예술적 표현이 요구된다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견해가 더 적절하다. (베르너 융, <미학사 입문>)


표현주의의 등장


회화와 조각을 단순히 눈이 아니라 머리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말 상징주의부터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표현주의자들에 의해 이런 생각이 유럽에 만연되었다. (김광우, <뭉크, 쉴레, 클림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표현주의는 얼핏 단순한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고 들어갈수록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세잔과 고흐, 그리고 마티스의 야수주의와 심지어 피카소의 입체파 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는 아니라고 고집할 수도 없다. 극단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면, 풍경화나 정물화를 비롯하여 양식과 관계없이 모두 작가의 내면이 담긴다. 또한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감정이 담긴다. 아름답게, 때론 처연하게···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화가의 자화상이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전위예술로서 표현주의는 당시 영향력이 지대했던 인상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뭉뚱그려 사용한 개념으로 보면 무난할 듯하다.

1871년 수립한 독일 제국은 유럽 최강의 국가였음에도 미술 분야에서는 보불전쟁의 패전국 프랑스에 뒤졌다. 저항은 ‘분리파’가 탄생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분리’는 아카데미 미술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1892년 바로크풍의 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린 프란츠 폰 레바흐(Franz von Lenbach, 1836~1904)의 절대 권력에 저항하여 뮌헨 분리파가 결성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에 대한 지식을 장려해 전시회 수준을 높이고 국제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이어 1893년 드레스덴 분리파, 1897년에는 구스타브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 그리고 1898년 베를린 분리파(회장 리베르만)가 결성되었다.

운동으로써 표현주의는 프랑스의 야수파와 같은 시기인 1905년부터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1911년경 베를린의 화상 파울 카시러가 노르웨이 화가 뭉크(혹은 막스 페히슈타인)의 작품을 보자 인상주의와는 달리 부를 말이 필요했다. 표현주의, 강렬한 감정이 실어 형태를 왜곡하고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 그림과 판화를 보고 반복적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어는 1911년 잡지 <데어슈투름> 8월호에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작품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표현주의란 말을 사용했다. 그해 열린 ‘베를린 분리주의 전시회’ 도록에서는 피카소부터 프랑스의 젊은 아방가르드까지 포함한 입체주의와 야수주의 화가들이 이에 해당한다. (제목 그림; 뭉크, <죽은 자의 침대(1893)>

뭉크, <고뇌에 찬 자화상(1919)>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를 전후로 표현주의자들의 작품 세계가 극명하게 갈렸다. 이 소용돌이를 직접 경험한 작가들은 전쟁의 참혹상, 사회적 부당함과 정치적 억압 등을 기존의 순수미술을 왜곡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외부의 인상’이 아닌 ‘내면의 표현’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한 헤르바르트 발덴이 1918년 <표현주의, 미술의 전환점>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프랑스 입체주의, 그리고 뮌헨의 청기사파 모두에게 적용했다. (노르베르트 볼프, <표현주의>)

그러나 발덴은 이미 1913년에 열린 ‘제1회 독일 가을 살롱’에서 청기사 그룹을 일러 ‘독일의 표현주의자’로 소개하면서 그 범주를 독일어권으로 제한한 바 있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다리파(Die Brücke)를 비롯한 독일 화가들을 지칭하는 범주로 고착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전후 표현주의자로 남아 있던 막스 베크만, 게오르게 그로츠, 오토 딕스, 에밀 놀데가 1925년에 신즉물주의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퇴폐 미술로 낙인찍음으로써 표현주의 화가들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양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다시 태어났는데, 그때의 이름은 ‘추상표현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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