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출신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사진 찍기를 즐겼다. 하지만 “카메라가 천국과 지옥에서 사용되지 못하는 한 화가와는 경쟁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회화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자연의 재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런 그를 일컬어 ‘인간의 내면을 담은 최고의 화가’라는 찬사를 보냈다. 1814년 독립한 노르웨이는 미술에서 자국의 입지를 구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89년 뭉크는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첫 개인전을 연 직후 국가 장학금을 받고 1892년 3월까지 프랑스 유학을 마쳤다. 그리고 그해 9월 오슬로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떠들썩했던 ‘뭉크 스캔들’은 1892년 11월 5일 베를린 예술가협회 초청 개인전 때 발생했다. 당시 총 55점을 전시했는데 보수적인 미술계와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황제의 궁중화가 안톤 폰 베르너(Anton Alexander von Werner, 1843~1915)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런 쓰레기를 당장 철거하라”고 화를 냈다. 성과 죽음, 그리고 폭력적인 이미지가 중심이 된 전시회는 결국, 1주일 만에 끝났다. 그러나 뭉크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그 충격으로 인해 1898년 베를린 분리파가 탄생했다. 그 계기는 뭉크를 지원했던 독일 인상주의 화가 막스 리베르만(Max Liebermann, 1847~1935)이 주도했다. 이때의 명성 직후 완성한 대표작이 바로 <절규(1893)>다.
류머티즘으로 인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하던 어느 날, 뭉크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태양이 무너졌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혹독한 기억을 이미지로 옮기면서 필수적인 인상만 남기고 세부 서술은 몽땅 제거했다. ‘절규’는 전경 인물의 입과 귀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작품 전체가 주는 느낌으로 보는 사람의 청각을 자극한다.
뭉크는 감정을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먼저 형태를 뒤틀었다. 얼굴을 단순하게 과장 왜곡했다. 항아리에 담겨 자궁 속 태아의 자세로 발견된 잉카의 미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크게 뜬 눈, 한껏 벌린 입, 비틀린 몸은 무언가에 매우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멀리 뒷모습의 친구 두 사람과 배 두 척을 제외한 모든 형상을 과감히 생략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모습이 평온하다. 이상한 낌새를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뭉크에게만 들리는 <절규>이며, 절대 고독을 의미한다. 다리 난간의 아찔한 사선 처리는 작가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구성이다. 깊이감을 부여하나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진하는 형국이다.
그는 색으로 시를 썼다. 색을 느끼고, 색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저 노랑, 빨강, 파랑, 보라가 아니다. 슬픔이고 절규이며, 멜랑콜리와 쇠락이다. 그중 빨간색이 중요하다. 뭉크에게 들린 ‘자연 속의 거대한 비명’은 대체로 검은색과 흰색으로 그려진 드로잉에도 빨간색을 포함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휘몰아치는 듯한 적황색 하늘과 렌즈 모양의 구름은 북유럽 특유의 날씨를 나타낸다. 이것은 의외로 그곳 화가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며, 우울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파랑과 검정의 바다 위에 그은 선은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불안정한 공간이자, 그의 내면 묘사다.
<절규>는 1890년대 작업했던 <생의 프리즈> 연작 중 하나로, 그중 가장 거칠고 표현적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탄생한 작품이 아니다. 이미 <절망>에서 예고되었다. 주제는 계속 진화했으며, 원작 이후에도 같은 제목의 연작과 판화로도 제작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염성을 가진 광기가 느껴지며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위험한 작품으로 취급되었다. 1937년, 나치에 의해 독일 미술관에 있던 그의 작품 82점이 퇴폐 미술로 분류되어 몰수되었다.
그의 중심 모티브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고, 자신도 병에 시달렸다. 이런 죽음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그는 평생 자기 경험을 이미지로 옮겼다. <절망>, <임종>, <애수>, <죽음과 소녀>, <죽음의 투쟁>, <질투>. 그리고 <절규>의 변형된 작품만 해도 무려 50종이나 된다. ‘뭉크’는 승려라는 뜻이다. 노르웨이에서 그림을 시작하여 독일과 파리에서 대부분 활동했다. 마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당시로선 급진적인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다. 쇠라의 점묘법도 실험했으며,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그림이 단순, 명료해졌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하나 표현주의를 최초로 담은 선구자로서 평가가 무난하다. 프로이트와 니체가 동시대를 살았고, 주위에 표현주의 동료 화가로 클림트와 실레가 있다.
독일 다리파에 영향을 준 뭉크의 양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자전적 작품 하나를 더 소개해야겠다. <봄(1889)>은 <절규> 이전 그가 막 표현주의로 접어들었을 때의 전환기적 작품이다. <절규>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불안과 기괴함이 발견되지 않는다. 첫 대표작 <병든 아이>를 그리고 나서 3년 후 작품이다. 연작의 성격이 강하다. 작품의 제목은 봄인데, 폐결핵으로 인해 죽어가는 소녀를 그렸다. 창문 앞에 둔 화초가 꽃을 피워 봄을 알려주지만, 소녀는 고개 돌려 계절의 잔인함을 외면한다. 뭉크의 열다섯 살 누이 소피다. 열네 살 때 겪은 모습을 11년 후 ‘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그렸다. 이 말은 현재를 그렸던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켰다는 의미다. 누이를 돌보는 이는 이모 카렌은 죽은 어머니를 대신했던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병든 아이>에서 절망적 모습과 대조적으로 조카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마치 전염병처럼 여긴다. 그러나 당시 뭉크 자신도 병상에 있었음에도 죽음을 잔잔하게 표현했다.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면서 자신의 감정 변화를 솔직하게 전달해 주었던 브랜다이스 대학 사회학 교수 모리의 말이 생각난다.
“죽어 가는 것은 그저 슬퍼할 거리에 불과하네. 불행하게 사는 것과는 또 달라.”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예상과 달리 뭉크는 여든한 살까지 살았다. 가족사로 비추어 볼 때 이는 기적이자 인간 승리다. 1908년 가을부터 8개월 동안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다니엘 야콥손 박사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뭉크는 이후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와 크라예뢰에 정착했다. 역설은 그가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는 강렬한 문제작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1932년부터 1935년 사이에 <생의 프리즈> 모티브들을 강렬한 색조로 다시 작업했다. 스스로 '급진적인 복사 작업'이라고 일컬었다. (에드바르 뭉크, <뭉크 뭉크>) 그리고 말년에 죽음의 공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드러난 <창문 옆에서(1940)>와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1940~1943)> 같은 작품을 마지막으로 1944년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다. 자전적인 그림을 그렸던 그이기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연스럽게 독창성 '불안'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보고 세상이 공평하다고 해야할 지, 잔인하다고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는 모든 재산과 작품을 오슬로시에 기증했고, 시는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뭉크 미술관을 세웠다. 예술의 생명은 영원하다. 뭉크는 지금도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즐거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