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주의와 표현주의를 두부 자르듯 분명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공통점은 둘 다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굳이 구별하자면 은유의 ‘상징’, 직유의 ‘표현’, 뭐 이 정도. 19세기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진보적 작가들은 별도의 분리파를 조직했다. 뮌헨, 베를린, 그리고 빈에서 독자적인 그룹을 출범시켰다.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상업적 관심만 가진 장사꾼 예술가의 무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따라서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가진 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 사이의 간극을 없애려 했다. (질 네레, <클림트>)
이는 예술을 실생활에 적용코자 하는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시대정신이었다. ‘새로운 예술’이란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유럽 전역 및 미국으로 널리 퍼졌던 장식적 양식을 말한다. 1890년 파리에서 시작되어 1910년 사이 국제적으로 유행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를 대표했다. 그리고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클림트는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성(性),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를 표현했다. 이런 면에서 그를 세기 초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로 꼽힌다. 프로이트의 논문이 끼친 영향으로 판단된다. 팜므파탈(Femme fatale, 프랑스어 ‘치명적인 여자’ 즉 악녀의 캐릭터다)을 주제로 작품 활동했는데, 남성은 아예 없거나 여성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심지어 유작이 된 <아담과 이브(1917~1918, 미완성)>에서조차 아담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랬던 그가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키스>에서 남성과 여성의 통합, 그것도 남성에게 주도권을 주었다. 그리고 성적인 요소를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검열을 피해 갔다.
키스 역시 상징주의 작가들이 즐겨 다루었던 모티브다. 상징주의 운동의 절정은 1885년에서 1895년, 그리고 1900년까지 이어졌으며 이후 개인적인 작업은 1914년까지 진행되었다. (니콜 튀펠리, <19세기 미술>) 클림트가 <연인>이라고 부른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상징성보다 키스 이전 남녀의 심리 묘사이다. 그러나 금박판을 사용한 모자이크 형태의 눈부신 장식으로 인해 연인의 모습에 집중할 수 없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향해 다가가려 한다. 여자는 순종적으로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도, 손에는 망설임이 나타난다. 무릎은 꽃밭 위에 꿇었지만, 그녀의 긴장한 발가락 바로 뒤는 벼랑이다. 불안정한 상황에서의 <키스>다.
연인 에밀리 플뢰게(추정)를 안고 있는 본인을 암시한다. 동생의 처제였던 에밀리는 1891년에 처음 만나 1918년 56세의 클림트가 뇌졸중과 폐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한결같이 지켜준 여인이다. 평생 독신이었던 클림트는 말년에 더욱 과격한 애욕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미혼이면서 패션살롱을 운영한 에밀리와의 사랑은 순수했던 것 같다.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키스>는 그의 재기를 알리는 작품이었다. 클림트는 새로 지은 빈 대학의 대강당 벽화 <철학>, <의학>, <법학>>을 그렸다. 그러나 <철학>에는 무지에 대한 이성의 승리가 없었고, <의학>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학문으로 찬양하지 않았으며, <법학>에서는 정의를 지키는 권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사위원회 측에서는 예비 스케치와 다르다며 반발했다.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철학>을 빈 문화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매도했다. <의학>과 <법학>도 ‘과도한 성도착적 표현’ 혐의로 기소되었다. 교육부의 승인을 받았지만, 벽화는 대학이나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5년 임멘도르프 성에 전시된 작품들은 점령한 나치가 지른 불에 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어 구약성서에 나오는 무거운 주제를 성적 판타지로 가공한 <유디트 Ⅰ(1901)>로 인해 유대인 후원자들이 그의 곁을 떠났다. 게다가 제14회 분리파 전시회에 내어놓은 <베토벤 프리즈(1902)>가 그룹 내 분열을 일으켰다. 화면 일부에 여성의 음모나 정자와 난자 등의 이미지를 아무렇지 않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지지자들과 함께 1905년 분리파를 떠났다. 그러나 이 결별로 인해 분리파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클림트에게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검열이 작동하는 정부 기관의 작업을 의뢰받지 못했다. 따라서 상류층 고객의 초상화로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서 자기 양식을 정립했다. 1906년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으로 시작해서 1907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에서 절정을 이뤘다. 라벤나의 비잔틴 모자이크화의 영향이 반영된 작품으로, 기하학적 문양은 고대 그리스 미케네의 도기g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키스>와 <다나에(1907~1908)>가 이때의 대작이다.
클림트는 성적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비판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09년 ‘빈 종합 미술전’과 파리에서 로트레크와 야수파 화가를 만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대중의 사랑을 받던 비잔틴풍의 황금색 모자이크 장식은 자칫 작품을 천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황금색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장식성을 돋보이도록 했다. 최첨단 패션과 화장법, 그리고 장신구를 이용해서 누드를 자제하며 의상을 입히는 효과를 자아냈다. 자연스럽게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누그러트려 위험하지 않은 여성인 양 위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내가 성도착증 환자가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작품이 주는 관음증 성향 때문이다. 이후에도 클림트는 여성의 은밀한 행동을 탐구하여 드로잉으로 남겼다.
뭉크의 <키스>는 클림트의 작품보다 격렬하다. 남녀 두 사람의 얼굴엔 경계가 사라질 정도로 녹아내렸다. 그러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붉고 푸른색의 혼합이 그렇고, 훤한 밖을 차단하기 위해 쳐놓은 엷은 커튼이 그렇다. 지금은 앞뒤 안 가리고 서로를 탐하지만, 결론은 어쩐지 파국으로 치달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방안에 쫙 깔렸다. 뭉크의 자기 내면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키스는 섹스보다 더 가슴 떨리게 하는 단어다. 오히려 사랑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에게 여인과의 사랑이 마냥 설레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뭉크는 사랑에서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와 연관되었던 여인들은 진정한 팜므파탈이었다. 첫 키스를 바친 세 살 연상의 유부녀 하이베르크 부인과 툴라 라르센은 뭉크에게 여성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생의 프리즈> 연작 중 <생명의 춤>은 중앙에 여인이 등장한다. 선정적인 춤으로 남자를 이끄는 붉은 머리의 여인은 바로 팜므파탈을 상징한다. 치명적인 유혹과 상대를 집어삼키는 관능미를 지닌 여인이다. 작품은 툴라 라르센을 사귈 때 완성했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요하게 결혼을 요구했다.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다 오발로 인해 그의 왼쪽 가운뎃손가락에 관통상을 입혔다. 이후 뭉크는 정서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지고 피해망상증에 시달렸다. 1909년에야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뭉크는 고국 노르웨이 크라예뢰에 집 한 채를 임대한 후 풍경화를 그리면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