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너와 헤켈의 참전과 풍경화
1897년~1914년까지 빌헬름 2세가 이끄는 독일 사회는 여전히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 지속되었다. 비록 그가 해임하였으나 비스마르크 전임 재상의 철혈 정책에 힘 입은 바 크다. 철강 생산량은 프랑스의 3배였으며, 루르 지방의 노동 인구는 90%나 증가했다. 그러나 과잉 생산과 산업·지역 간 불균형은 위협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에디나 베르나르, <근대 미술>)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기차나 버스로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가면 ‘독일의 피렌체’라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1905년 이곳에서 네 명의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Kirchner, 1880~1938)과 프리츠 블라일(Fritz Bleyl, 1880~1966), 그리고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1883~1970)과 칼 슈미트 로틀루프(Karl Rottluff Schmidt, 1884~1976)에 의해 다리파가 형성되었다. 모두 미술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22~25세의 청년이었다.
최초의 표현주의 단체 다리파는 1906년 헤켈이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 1881~1955)을, 슈키트 로틀루프가 네 사람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를 영입했다. 나이는 놀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1년 반 동안 다리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프란츠 뇔켄, 오토 뮐러, 보후밀 쿠비슈타가 합류했다. (볼프디터 두베, <표현주의>) 다리파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긴박한 사회상과 결부된 탐구적 그룹이었다. 여기서 ‘다리’란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이어주는’ 다리이며, 그 이름은 19세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따왔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다리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범인을 초인(招人)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자기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아차리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이 ‘자기 사랑’의 정신은 ‘자기만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 사랑’이다. (신정현,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그러려면, 인간을 수단이 아닌 ‘관계’로서 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다리파는 전통과 진보, 과거와 미래, 신구 세대뿐 만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를 이어주는 예술을 지향했다.
1910년과 1911년 여름, 독일 작센주에 위치한 모리츠부르크(Moritzburg) 호수에서 키르히너, 헤켈, 페히슈타인이 함께 지내며 집단 누드를 그렸다. 과묵하고 내성적이던 슈미트 로틀루프는 공동 작업에서 빠졌다. ‘풍경 속의 누드’는 이들만의 독특한 테마이다. 호숫가에서 모델들과 자유롭게 지내면서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담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누드의 호기심은 ‘벌거벗음’에 기반하지 않는다. 당시 유행하던 인체 해방 문화, 즉 자연의 향유와 나체주의의 표방이다. 네이처리즘(Naturism)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라이프 스타일로 사회적인 노출을 통해 표현되며,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존중을 특징으로 한다." 성을 욕망의 분출 대상이나 상품으로 대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누드는 외설스럽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다리파는 회원간 급진적인 정치관을 공유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새로운 양식을 모색했다. 빠른 붓질, 선명한 색채, 단순한 형태가 특징이다. 그러나 1911년 이후 화가들은 점차 자신의 길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1912년 여름 퀼른에서 열렸던 서부 독일 분리파전 <존더분트>전에서 마침내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그들의 출품작이 국제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당대 프랑스 화가 세잔, 피카소, 고흐, 마티스, 뭉크의 그림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대규모적 공동 행동이었다. 모임의 지향점과 화가 개인적 특성에서 분리 현상이 뚜렷해지자 다리파는 베를린 신분리파에서 탈퇴했다. 신분리파 회장인 페히슈타인은 이에 반발하여 다리파를 떠났다.
다리파의 마지막 전시회는 드레스덴에서 열렸고 1913년 5월 결국, 해체를 선언하는 공지문이 후원 회원들에게 발송되었다. ‘다리’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은 표현주의가 태어날 수밖에 없는 히스테리한 상황이었다. 이 점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색채 사용에 영향을 미쳤던 야수주의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와중에 새로운 독일 미술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다리파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 화가들은 시대의 고뇌와 불안을 소위 ‘예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야만적인 본능’이라 했던 에로티시즘이나 웃음에서 이러한 불안이 드러났다. 형태를 왜곡하고, 격렬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인 색채를 택했다.
키르히너와 헤켈의 참전과 풍경화
1911년, 키르히너와 친구들은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다리파는 자연 풍경과 도시 풍경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 그중 베를리너들이 특히 좋아한 화가 키르히너의 <베를린의 거리 풍경>이다. 그의 <거리 풍경> 연작은 생명력 넘치는 기쁨의 힘이 사라진 대도시 풍경에 집중했다. 구도는 수직으로 그려져 있으며, 화면은 상단 끝까지 꽉 채워져 있고, 전경과 배경은 긴장감이 가득한 관게로 긴밀하게 묶여 있다. (볼프디터 두베, <표현주의>)
<서구의 몰락>을 쓴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유럽에서 베를린은 ‘바빌론의 창녀’라고 말했다.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1870년 1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1914년에는 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깨끗하고 효율적으로 유지되는 도시 중 하나지만,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폴란드 작가 요제프 크라셰프스키(1812~1887)는 베를린을 ‘끝없는 포위상태’에 있는 도시처럼 질서정연하고 순종적이며 통제된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키르히너는 들쑥날쑥하고 예리한 선과 비현실적 분위기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베를린을 풍자했다. 이 우울한 도시에서 발견되는 인간 군상은 가면을 쓴 듯한 얼굴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같은 시기 <포츠담 광장(1914)>은 밤의 거리를 묘사했다. 베를린 중심부에서 약 25km 떨어진 하벨 강가에 있는 이곳은 매춘부가 장악했다. 그리고 고립된 원형 교통섬에 서 있는 두 여인의 시선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다. 분리, 분절된 세계다. 녹색이 지배한 밤이 여인들의 얼굴도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그러나 병적이다.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은 다리파가 해체된 이후의 작품이다. 키르히너는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부정한 사회를 심판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인형극’이었다. 결국, 군사 훈련을 막 마치고 불과 2개월 만에 신경 쇠약으로 조기 제대했다. 그는 여러 요양원을 두루 거쳐 1917년 스위스 다보스에 정착했다. 작품 속 독일군 75연대 견장이 달린 군복과 모자, 키르히너의 초점 잃은 눈동자, 특히 절단된 오른쪽 손목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했다. ‘가장 위대한 반전(反戰) 그림’이다. 그림 속 누드는 반 문명·반 근대화를 상징하며 ‘원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는 나치에 의해 자신의 그림이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전시 금지 명령을 받았다. 회화, 목판화, 드로잉을 합해 총 639점이었으며, 그중 32점은 이후 '퇴폐미술전'에 출품되었다. 그는 이에 항의하여 1938년 모든 작품을 불태웠다. 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그해 다보스에서 가슴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자살은 약자가 강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폭력이다.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스스로 끊은 것이다.
헤켈의 <목욕하는 사람들>에는 위에서 조감하는 시선과 각지고 들쭉날쭉한 선 처리, 그리고 두꺼운 물감칠의 특징이 나타난다. 다리파는 후기 인상주의자, 이를테면 세잔, 고흐, 고갱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 세잔의 <수욕도>와 비교되는 헤켈의 <투명한 날> 역시 '여성의 누드'가 모티브다. 르누아르와 달리 누드가 단순하며, 각진 선으로 인체의 윤곽을 검게 경계 지었다. 고갱의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e)이다. 빛의 반사와 굴절은 크리스털처럼 투명하며 하늘과 땅, 물, 그리고 사람을 한데 결합했다.
1909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자원입대하였으나 현역 부적격 판정을 받고 병원 잡역부로 복무했다. 1914년 오스탕드에 배치되었을 때 공교롭게도 막스 베크만을 만났다. 둘은 같이 부상자, 사망자, 죽어가는 군인들을 수없이 보았을 텐데 헤켈의 작품에는 베크만처럼 신랄한 사실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내면 역시 세잔을 닮아 사회적 저항과는 유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제목 그림은 에리히 헤켈의 <두 부상병(1915)>이다) 그는 미술사가 발터 케즈바흐의 도움으로 군 복무 중에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 당시 그의 몸과 마음을 지속해서 압박했던 감정과 정서는 <평원의 남자>와 전후 작품 <남자의 초상>을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전쟁을 통해 느꼈던 임박한 절망과 전후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여하튼 고통받는 이가 존재한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무겁게 살아야 할 까닭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살려면, 평생을 갖고도 부족한 세상이다.
1937년 나치는 그를 퇴폐미술가로 분류했고, 작품 729점을 압류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작품 상당수가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나치는 성의 차원을 넘어 인간 자체에 우(優)와 열(劣)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인종주의,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지향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약 1,500년에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던 기마 유목민들이 카이버고개를 통해 북쪽으로부터 인도로 들어온 민족이다. 그들은 피부색에 따른 위계질서, 즉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냈고, 자기들은 높은 카스트에, 인도 토착민인 드라비다족은 낮은 카스트에 위치하게 했다. 정복자와 피지배계급 간에 나타나는 흔한 현상이다. 나치도 비슷한 의도에서 아리안 민족을 차용했다. 나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독일인 중 병자, 장애인도 사회적으로 격리했다.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도 같은 자를 들이댔다. 많은 예술가, 특히 인간 내면을 화폭에 담았던 상징주의, 표현주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규정했다. 나치는 그렇게 병들었고, 독일 사회를 오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