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딕스의 참전과 세 폭화

by 노인영
오토 딕스 군인 모습의 자화상 1914.png <군인 모습의 자화상(1914)>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의 <군인 모습의 자화상>이다. 그의 표정에 드러난 전쟁의 모습이 이처럼 실감날 수 없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추상적이거나, 존 싱어 사전트의 <가스 부상병>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적나라하고 강렬하다. 직접 체험이고, 자기 내면을 그렸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고흐의 자화상보다 더 근접해서 그렸다. 깎은 머리 하나가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 화폭 전체를 지배한다. 색채도 매우 공격적이다. 빨강, 노랑, 주황을 검정과 하양에 섞어 마치 분탕질하듯 거칠게 섞었다. 전쟁 초기 포병연대에 배속되어 훈련을 마친 직후의 작품이지만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살기가 가득하다.

스물세 살 오토 딕스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러나 작품 속에는 정치인들이 치장했던 애국심, 사명감, 이런 것들은 발견하기 어렵다. 특히 그의 하얀 시선과 마주치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피하게 된다. 공포가 전이되기 때문이다. 노르베르트 볼프는 이를 일러 ‘다쳐 궁지에 몰린 야생동물’에 비유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1915년 그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서부전선으로 보내졌다. 혹독한 가을 전투를 끝내고 숨 쉴 틈도 없이 그해 겨울, 거의 6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참호전을 훌륭히 견뎌낸다. 11월에 부사관으로 진급했고,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어 1916년 11월에는 프랑스 동북부의 베르됭 북쪽 솜강에서 무려 47만 명이 죽은 전투에서 싸웠다. 1917년 러시아 참호전이 있었고, 1918년 2월 플랑드르에 배치되었다. 그해 8월 목에 상처를 입었으나 곧바로 조종사 교육을 받았다.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은 ‘생존’이다. 그해 12월, 마침내 전역했다. 인류가 가장 큰 공포를 느꼈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가장 끔찍한 조건에도 거의 매일 일기를 썼고, 틈틈이 600여 점의 드로잉과 구아슈 수채화를 완성했다.


전후 독일 국민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트라우마와 굴욕감에 시달렸다. 격렬한 반군국주의자가 된 딕스는 전쟁의 참상과 추악함을 사실대로 알릴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려는 표현주의가 혼란스러운 독일 사회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경향으로 흐른다고 판단했다. 한가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로 기울어졌다. 표현주의와 엘리트주의적인 추상에 반대하는 경향으로, 독일 사회에 만연한 체념과 냉소를 반영한 움직임이다.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날카로운 눈으로 생명체까지 객관성을 띤 사물로 인식한다. 딕스는 강렬한 색채와 과장된 캐리커처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희화화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아들인 딕스는 특히 좌파 입장에 서서 군국주의와 자본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세 폭 제단화 형식의 <대도시(1927~1928, 제목 그림)>에서는 환락과 신흥 부자들의 취향이 드러난다. 붉은색이 주를 이룬 중앙 패널은 마치 불붙은 밤의 공간에서 향락에 쩔은 군상(群像)이다. 그러나 이 야행성 인간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지 않는다. 소통의 단절이자 또다른 소외다. 왼쪽 패널이 압권이다. 매춘부를 유심히 바라보는 상이군인에게 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고 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전쟁 희생자의 비참함을 육화(肉化)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1929~1932)>

역시 세 폭으로 완성한 <전쟁>은 강렬한 빛과 차가운 색채로 종말론적인 세상으로 요약했다. 병사들이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떨어뜨리고, 시체가 썩어가는 참혹한 전투를 경험하게 하며, 다친 병사를 끌고 나오는 자기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구성했다. 특히 아래 패널에는 <죽은 예수(1521)>를 차용하여 한스 홀바인의 사실성을 찬미했다. 그는 전쟁을 이렇게 규정한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어떤 거대한 것이다. 나는 절대로 이것을 잊지 않았다. 당신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런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어야만 한다. (·····) 나는 삶의 가장 나쁜 면을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전쟁에 참여한 이유이자 군에 자원했던 이유다.” (노르베르트 볼프, <표현주의>)

<전쟁포로로서의 자화상(1946)>

딕스는 전쟁의 공포, 도시 사회의 퇴폐, 노동자의 소외와 자본주의의 병폐, 성(性)의 폭력적 측면 등을 가차 없이 그려냈다. 당연히 나치가 반겨할 리 없다. 그들의 프로파간다가 폭로되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작품 260점이 압수되고 전시도 금지되었다. 초상화가로 출발한 그에게 풍경화만 그리라고 했다. 코미디 같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했다. 1939년에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수감되었다. 평범한 시민 엘저는 뮌헨의 히틀러 연설장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지만, 히틀러가 예정보다 일찍 떠난 후 13분 만에 폭탄이 터졌다. 엘저는 처형당했다.

1945년이 되자 쉰이 넘은 딕스는 ‘나치돌격대’ 강제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콜마르에서 전쟁포로가 되어 알자스 나치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6년 풀려났다. <전쟁포로로서의 자화상>은 당시의 모습을 담았다. 철조망 울타리 안에 그는 마르고 초췌하다.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 사이 삐쭉 나온 아랫입술과 가늘게 뜬 눈 밑의 그늘이 영락없는 포로의 모습이다. 그러나 격렬하지 않다. 전쟁의 광기가 사라지고 차분하다. 홀씨가 날아간 뒤 민들레 꽃봉오리 같은 대머리 수용자와 함께 있어 자칫 웃음이 새어 나올 수도 있겠다. 오토 딕스는 종전 후 아카데미 회원에 복귀, 보덴 호반의 헤멘호헨에서 활동했다.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일을 떠나지 않고. 작품은 베를린 시절에 비해 다소 차분해진 양식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미술가들은 진실을 수정하거나 개선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저 실체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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