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반전(反戰) 작품

by 노인영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두 진영은 각각 상대방을 침략자라 규정했다. 약간의 상비군을 지녔던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했다며 징병제도를 서둘러 도입했다. 영국은 줄곧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을 ‘유럽의 심장부를 겨냥한 권총’이라고 여겼기에 유럽 내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가 먼저 조국을 향해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며 규탄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군대가 행진할 때 입을 모아 “라인강을 수호하라”고 힘차게 외쳤다. 이때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1867~1945)의 열여덟 살 둘째 아들이 전쟁터로 나가겠다고 했다. 먼저 입대한 한스를 면회 가 연병장에서 군복을 입은 앳된 얼굴을 확인한 터였다. 가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줄 알면서도 그녀는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 카를이 나서서 아들을 타일렀다. “조국은 아직 네가 필요하지 않아. 그랬다면 벌써 불렀을 거야.” 아들이 대답했다.


“조국이 제 나이 또래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나는 (조국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막 움트기 시작한 청년기에 할 일이 많은데, 페터는 그렇게 떠났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춘 게 전부였다. 1914년 10월 10일 일이다. 편지가 왔다. 딱 한 줄. “포성을 들으셨겠지요?” 그리고 정확히 6일이 지난 후 그녀는 10월 30일 한 통의 전문을 받는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부모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전선으로 간 지 20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케터 콜비츠뿐이었겠는가? 그녀는 자식의 삶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분노했다. 아들은 정부에 의해 전의를 북돋우는 선전전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그때 결심했다. 아들이 사랑했던 조국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10년 후 공적인 저항, 반전 운동을 시작했다.


<피에타(1937~1938)>

참혹한 전선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경험한 군인들은 종전 후 새롭고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중 하나가 반전(反戰) 운동이다. 그녀는 1924년에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반전 메시지를 전달했다. <전쟁> 연작이다. <전쟁은 이제 그만!>을 비롯한 일곱 개 목판화로 구성했다. 케터 콜비츠의 <피에타>의 배경이 된다. 뭉크, 클링거에게 영향을 받은 그녀는 원래 판화가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유화 대신 판화를 선택했으며, 늘 소외계층과 함께했다. 스물한 살에 어린 시절의 친구이자 의사인 카를 콜비츠와 결혼하여 빈민가에 요양원을 연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33년 케테 콜비츠는 나치에 의해 미술 아카데미에서 퇴출당했다. 남편 카를은 내과 의사 사회민주주의 모임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의료비를 지원하는 환자들을 받을 수 없었다. 거대한 인프라 건설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38년에 실업률을 3%대로 떨어트린 데 자신을 얻은 나치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씨앗이 결코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1943)>

그러나 그녀는 독일을 떠나지 않았다. 나치 치하인 1943년에 <씨앗이 결코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를 제작했다. 괴테가 한 말로, 그녀의 유언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그녀의 반전 태도는 더욱 강고해졌다. 1993년 헬무트 콜 총리의 제안에 의해 <피에타>는 ‘노이헤 바헤(전쟁과 독재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관)’에 전시되었다. 원본의 1.6배로 제작된 이 청동상은 천장의 뚫린 구멍으로 비가 들이치는 날이면 비를 맞고, 눈이 오는 날이면 눈을 맞으며 1년 365일 그 자리를 지킨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콜비츠의 절절함이 없다. 그녀는 평생 많은 화가가 남긴 그 흔한 풍경화가 한 점도 없다. 격동기 독일 국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대변했기에 그렇다. 불행한 일은 그녀의 전쟁 상흔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죽은 아들과 이름이 같은 손자 페터마저 앗아 갔다.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1943)>

케테 콜비츠는 마지막 유작 <병사를 기다리는 두 여인>을 통해 슬픔을 형상화했다. 제목처럼 작품에는 두 여인이 있다. 나이 든 여성은 숄을 둘러쓴 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마주 잡은 또 다른 젊은 여성이 있다. 두 여성 모두 콜비츠의 상징일 수 있다. 제1차 대전에서 죽은 둘째 아들 페터의 어머니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시아 전전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 페터를 잃은 할머니로서.

전쟁은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선택되는 ‘폭력적 외교 수단’이다. 지도자들은 힘주어 승리를 강조하면서 애국이란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목숨을 요구한다. 그러나 직접 참전하지 않는 정치인들은 정치가 전쟁의 승리에 있지 않고 예방에 있다는 것을 잊은 듯하다. 그리고 포탄에는 남녀와 노소를 구별하는 능력이 없다. 케테 콜비츠는 나치 집권 하에서 가시밭길을 걷다가 1945년 4월 22일 76세의 굴곡진 인생을 마감했다. 8일 후 히틀러의 죽음도, 다시 일주일 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도 보지 못했다. 꼭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절대 남자들만 치러야하는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목 판화는 <어머니와 죽은 아이(190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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