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후 통일 독일 제국이 출범했다. 문화에서도 파리를 경쟁 도시로 하여 베를린과 뮌헨이 성장했다. 그중 뮌헨에는 루브르를 의식해서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고대 조각을 전시하는 그루프토테크 같은 미술관이 지어졌다. 하지만 전위예술가들의 실험적 미술을 수용할 만한 문화 토양은 갖춰지지 않았다. 물질문명에 경사되어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는 미술을 이상적인 취향으로 여겼다. 이 와중에 1909년 1월,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를 회장으로 하는 ‘신미술가협회’가 창립했다.
당시 뮌헨에서는 ‘분리파’가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분리파는 ‘슈바빙의 보헤미안’(뮌헨의 거리 슈바빙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젊은 예술가를 지칭)이 주도하는 작품들을 ‘너무 혁명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배척했다. (지빌레 엥겔스·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그들 자신이 ‘귀족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를 맹목적인 추종하는 아카데미에 반발하여 출범했음에도 어느덧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으로 변모했다. '정(正)-반(反)-합(合)'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는 예술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가 보다.
신미술가 협회는 영혼에 귀를 기울이려는 ‘내적 필연성’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러나 다리파와는 달리 뮌헨 그룹은 회원 간 지적·예술적 수준 차이로 인한 긴장감이 팽배했다. 갈등을 표면화한 인물은 뮌헨에서 칸딘스키와 그림 공부를 같이한 알렉세이 야블레스키(Alexej von Jawlensky, 1864~1941)의 제자 에르트슬뢰와 카놀트였다. 그들은 협회 강령 “누구나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되, 합해서 4.2m를 넘지 않는다”는 규정을 경직적으로 적용했다. 그것도 회장 칸딘스키의 작품 <구성 Ⅴ(1910)>가 규정을 어겼다며 전시를 거부했다. 1910년 12월 2일, 실망한 칸딘스키를 비롯하여, 프란츠 마르크, 가브리엘 뮌터가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했다. (제목 그림은 여러 계열의 청색을 사용해서 그린 칸딘스키의 <무르나우의 교회(1910)>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1911년, 제3회 신미술가협회와 같은 날(12월 18일), 같은 장소(탄하우저 화랑)에서 <제1회 청기사 편집자들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렇게 보면 청기사파는 신미술가협회를 원류로 탄생하여 다리파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칸딘스키가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주도했는데 그때 이름 지었다. 둘 다 좋아하는 ‘푸른색’, 마르크의 ‘말’과 칸딘스키의 ‘기사’가 합쳐졌다. (이와 관련 1903년에 칸딘스키의 <청기사>라는 작품이 이미 존재했다는 이유로 그의 독자적 작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두 사람 외에는 야블렌스키, 가브리엘 뮌터, 파울 클레,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 아우구스트 마케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초월적 세계를 신봉하는 표현력 풍부한 예술 양식을 모색했다. 또한 훗날 입체파의 기수가 되는 프랑스의 조르주 브라크, 앙리 루소 등의 작품도 독일에 소개되어, 범(汎) 유럽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첫 번째 전시회에는 칸딘스키, 마케, 뮌터, 마르크를 비롯하여 앙리 루소, 알버트 블로치, 부르류크 형제, 엘리자베스 엡스타인, 오이겐 칼러, 장 블로에 니에슬레, 작곡가 쇤베르크, 캄펜덩크, 로베르 들로네가 출품했다. 참석자들은 대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작가의 감정을 수단으로 하는 회화여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러나 단 2주 만에 조직되었기에 총 43점의 선정 기준에 일관성이 없었다. 그리고 칸딘스키만이 청기사파가 가야 할 새로운 길로 추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견지했을 뿐 많은 화가가 사물의 재현이나 주제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전시회는 평론가와 대중으로부터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두 번째 전시회는 1912년 초 뮌헨의 미술상이자 서적상 한스 골츠의 화랑에서 열렸다. 이에 동참한 화가는 브라크, 드랭, 피카소, 블라맹크, 한스 아르프, 클레, 쿠빈, 놀데, 카지미르 말레비치. 다리파 회원들, 그리고 제1회 전시회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로 확대되었다. (볼프디터 두베, <표현주의>)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전시회였다. 독특한 이름과는 달리 새로운 그룹으로서 양식의 일치된 방향성이 없어 결집도가 떨어졌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주요 구성원 간 추구하는 방향이 매우 대조적이었다. 칸딘스키는 기하학적·음악적 추상, 마르크는 형이상학적 동물, 마케는 색채환상주의, 파울 클레는 동화 같은 마법의 세계를 추구했다. 특히 마르크는 모임보다도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어 그의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 또한 마케는 마르크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고려하여 제1회 전시회에 작품 3점을 출품하고 연감에도 참여했다. 그는 1910년 뮌헨의 한 미술상의 집에서 마르크의 석판화를 발견하고 마르크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그리고 평생 우정을 나누는 돈독한 친구가 되었다. 게다가 마케의 아내 엘리자베트는 베를린의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 베른하르트 쾰러의 조카였다. 쾰러는 마르크의 경제적 자립과 함께 청기사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회원들의 작품을 사들였고, <청기사 연감> 출판을 후원했으며, 훗날 그의 며느리는 이 작품들을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기증했다.
하지만 마케는 칸딘스키의 작품에 열광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채화 <청기사에 대한 조롱>을 그렸다. “칸딘스키와 마르크가 각자의 여자 기수를 앞세우고 경기장에 입장한다”며 비난했다. 그리고 마르크에 충고했다.
“청기사와 푸른색 말에 너무 빠져서 작업하지 말게나.” (지빌레 엥겔스·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마케의 말에는 칸딘스키의 연인 뮌터에 대한 불만이 잠복해 있다. 그녀는 결혼식 없이 동거하는 데 따른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여자라는 이유로 자기 작품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역정을 부리고 화를 냈으며, 특히 칸딘스키에게 그 불만을 종종 토로했다. 그럴 만한 것이 그녀는 신미술가협회와 청기사파의 공동 설립자였다. 그리고 존경하는 칸딘스키와 달리 독자적인 그림을 그렸다. 매우 밝은 물감을 섞지 않고 채색하였으며, 디테일을 생략한 채 단순한 구성과 대상을 검고 진한 윤곽선으로 둘러 자연을 표현했다. 칸딘스키도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미술계는 남성이 지배하였으며, 여성이 앞에 나서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칸딘스키는 그녀의 정당한 주장을 동료들에게 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마르크와 칸딘스키의 사이도 점점 더 벌어졌다. 칸딘스키도 몹시 달라진 주위의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다행인 점은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칸딘스키는 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1912년 예술연감 <청기사>과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발행할 수 있었다. 특히 후자는 출간한 그해 3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청기사파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