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의 예술적 번민과 뮌터

by 노인영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의 작품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을 때도 칸딘스키는 생활고를 겪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홍차 무역회사의 지배인으로 근무했던 부친이 보내주는 돈으로 충분했다. 1908년부터 매년 여름 뮌헨에서 남쪽 80km 떨어진 무르나우에 체류하면서 풍경화를 그렸다. 알프스 기슭의 소도시인 이곳에는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와 마리안네 베레프킨이 함께 살고 있었다. 칸딘스키가 이곳에서 동거에 들어간 여인이 바로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ünter, 1877~1962)다. (제목 그림은 가브리엘 뮌터와 칸딘스키가 무르나우에서 함께 그린 <뱃놀이(1910)>다)

가브리엘 뮌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1908)>

20세기 초 대도시에 사는 대학생이나 미술가 사이에는 부적절한 동거 문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칸딘스키가 새로운 사랑에 빠질 때는 미술을 시작하고 6년쯤 된 1902년이었다. 자신보다 11살 어린 스물다섯의 젊은 여성이 그가 세운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찾아와 첫 제자가 되었다. 뮌터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고, 당시로선 모험적이던 자전거 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야심이 없던 그녀는 인생과 작품 모두 꿈꾸는 듯했다. 하지만 칸딘스키의 수업에서 그녀는 새로운 예술을 경험했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한 두 사람은 칸딘스키가 별거 중인 아내 아냐(1911년 이혼)와 정식으로 헤어지기 전인 1903년에 약혼했다. 둘은 5년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무르나우의 동네 사람들은 칸딘스키 때문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러시아인의 집’이라 했다. 뮌터는 이웃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여 스스로 ‘칸딘스키 부인’이라 자처했다. 칸딘스키가 추상 미술로 전환한 시기도 이때이다.

칸딘스키의 <수채화로 그린 첫 번째 추상(1910)>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정신적 소모가 심했던 칸딘스키와 뮌터의 관계가 삐걱거렸다.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는 국외 퇴거를 명령받자 전처와 친척들과 함께 그해 12월 러시아로 돌아갔다. 청기사파는 해산되었으며, 뮌터는 비교적 왕래가 자유로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겼다. 초기에 둘은 재회를 약속하며 서신을 교환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내 칸딘스키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에게 새로운 여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이때 비로소 가난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유채화 재료를 살 돈이 없어 수채화에 만족했고, 그림은 힘을 잃었다. 그의 귀환을 기다리던 뮌터와 결별한 1916년에 결정타를 맞았다. 1917년, 쉰 살이 넘어 장교의 딸 안드레예프스키(니나)와 결혼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모색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그해 2월, 그리고 10월에 혁명이 일어났다. 부르주아 출신인 칸딘스키는 처형을 걱정해야 했다. 이때쯤 그는 독일도, 뮌터도 완전히 잊고 싶어 했다. 한편 3년간 코펜하겐에서 지낸 뮌터는 1920년경 쾔른, 뮌헨, 무르나우, 베를린에 체류했다. 그 사이 칸딘스키가 일방적인 결별을 선언했고,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1917년에서 1921년, 모스크바에선 예술과 문화 차원에서도 진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칸딘스키는 자기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문화행정의 요직을 맡았다. 그리고 러시아 전위주의, 특히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알렉산드르 로트첸코(Aleksander Mikhailovich Rodchenko, 1891~1956)의 구성주의(구축주의)를 만나며 새로운 기하학적 추상화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순수한 감각의 절대성과 로트첸코·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 1885~1953)이 요구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칸딘스키는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결국, 1921년 요직을 내려놓아야 했고, 대신 독일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을 선택했다. 한편 그의 독일 망명은 병으로 쓰러진 레닌이 휴양을 취하고 있을 때 소비에트 신정권이 모든 종류의 추상예술을 금지한 상황과도 연동되었다.


그를 초청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1919년에 설립한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주축으로 한 근대적인 종합예술 교육기관이다. 첨단 디자인으로 물질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실용적인 건축을 지향했다. 그러나 칸딘스키가 꿈꾸는 예술은 음악, 무용, 장식 등의 융합이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쨌든 1922년에 도착하여 바우하우스가 해산되는 1933년까지 회화와 미술이론을 가르쳤다. 칸딘스키에게는 그나마 이때가 제일 행복했다. 경제 불황과 보수적인 주민 운동에 의해 바우하우스는 1925년 독일 동부 데사우 시로 이전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나치계 주민들로 인해 1932년 다시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 해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폐교되었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그로피우스가 하버드 대학의 건축학과 책임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바우하우스 학장직을 계승했던 반 데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는 유리와 철근의 혁신적인 건축을 선보였다.

칸딘스키의 <컴포지션 Ⅷ(1923)>

이 과정에서 칸딘스키는 <컴포지션 Ⅷ>을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주요 작품 중 하나다. 맹렬함과 고요가 공존하며, 원들은 사선의 날카로움을 완화해준다. 왼편의 커다란 원은 작품 속에 나열된 모든 원의 근원이다. 1933년,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강제로 폐쇄하고 독일 박물관에 있는 칸딘스키의 그림 57점이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 압류되었다. 그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다. 1939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으며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그러나 한때 그의 모든 것이었던 뮌터를 찾지 않았다. 굳이 그를 편들자면, 5세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이모의 손에서 자란 트라우마 탓은 아닐까?

추상의 길목에 섰던 거장 피카소가 원시를 추구했다면, 칸딘스키는 현대적이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 요소를 도입하여 발랄함과 즉흥적 가벼움으로 마치 디자인을 연상시킨다. ‘가벼움’, 잘난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이다. 하필이면 그의 가벼움은 뮌터와의 사랑에서 나타났다.


가브리엘 뮌터 병자 1917.png
가브리엘레 뮌터 새들의 아침 1934.PNG
뮌터의 심리 변화가 담긴 <병자(1917)>와 <새들의 아침(1934)>

정신 치료를 하던 뮌터는 1926년에야 자신이 칸딘스키에게 있으나 마나 한 부속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27년 두 번째 동반자인 요하네스 아이히너를 만났다. 둘은 무르나우의 ‘러시아인의 집’으로 이사했다. 천성이 착한 여인이었다. 작품에서는 비록 야블렌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고 이해했으며 보호하고 발전시켜 준 칸딘스키에 대한 감정은 남달랐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대인 칸딘스키에게 돌려주지 않은 무르나우의 그림을 지키려 애썼다.

1930년 초 뮌터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1934년 자전적 초상화 <새들의 아침>에는 과거 시절을 회상하는 자기 모습과 함께 표현주의적 뿌리를 찾기 위해 골몰한 흔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전후 청기사파 회고전을 위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50년부터는 소장한 작품을 독일의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1957년에는 화가로서 성공을 맛본 그녀는 80세 생일을 맞아 시립미술관 렌바흐하우스에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기증했다. 거기엔 칸딘스키 유화를 비롯한 청기사파 작품 90여 점이 포함됐다.

뮌헨의 작은 갤러리에 불과하던 레바흐하우스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1958년 아이히너에 이어 1962년 뮌헨에서 그녀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쁜 남자 칸딘스키가 죽은 지 18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情)이라 했던가? 여자의 사랑, 그것도 뮤즈로서의 사랑. 그건 남성들의 단순한 두뇌로 풀기에는 너무나 난해한 고등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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