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에서 다시 태어난 파울 클레

by 노인영

스위스 음악적인 가문 출신의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매우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종종 음악이론을 그림에 도입하여 표현적인 색채와 세심한 선을 조화하려 했다. 색조는 음색, 색상은 가락, 채도는 음의 크기를 연상케 했다. 이런 음악에 대한 공감으로 칸딘스키를 비롯하여 청기사파와 교류했다. 그렇지만, 칸딘스키가 반했던 쇤베르크가 만든 무조(無調)의 불협화음이 아니라 18세기 다성 음악에 바탕을 두고 색을 사용했다.

그의 미술은 어떤 특정한 사조에 편입시키기 어렵다. 독일 뮌헨에서 활동 초기, 그는 드로잉 기법은 능숙했으나 색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명료한 생각이 없었다. 화가라기보다 그래픽 작업을 하면서 색을 탐구하는 소묘 작가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러던 중 누구의 삶에서나 발견되는 운명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1914년 4월 튀니지 여행이 그것이다. (제목 그림은 <카이루완의 문 앞에서(1914)>이다)


1911년 루이 무아예(Louis Moilliet, 1880~1962)를 통해 마케를 만난 이후 세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났다. 행운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햇빛이 가차 없이 쏟아지는 튀니지는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색채 구사에 연구가 깊었던 곳이다. 이후에도 모네, 르누아르, 마티스가 이곳에서 동방의 빛과 색채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예술을 변형하려는 희망을 키웠다. 무아예는 클레가 섬세하게 색을 잘 표현한다고 부추겼고, 마케는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리면서 색채에 관해 토론했다. 원색의 변화와 이국적인 문명을 체험하면서 클레는 비로소 색과 하나가 되는 행복감을 느꼈으며, 독자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최종 목적지인 아랍 도시 카이루안에 도착했을 때 클레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색채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색채가 항상 나를 소유할 테니까. 나는 안다. 이 행복한 순간의 의미는 이것이다. 색채와 나는 하나다. 나는 화가다.” (앨리슨 콜, <색채>)


클레 카이루완 풍경 1914.jpg <카이루완 풍경(1914)>

검은색, 흰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던 클레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밝은 수채화 작품을 발표했다. 밝은 흰색, 아름다운 노란색, 파란색, 연한 자주색, 녹색으로 가득했다. <카이루완 풍경>은 건물들을 사각형으로 색을 겹쳐 칠했지만, 모스크 지붕과 창문이 선명하다. 그래서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클레 붉고 하얀 돔들 1914.png <카이루완 양식(1914)>

<카이루완 양식>은 좀 더 순수 추상으로 기울었다. 왼편에 갈색, 빨강, 노랑, 녹색의 작은 직사각형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오른편으로 갈수록 형태가 커지고 색이 밝아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녹색과 파랑이 흐려진다. 드문드문 둥근 원이 보이는데, 마치 소리가 커졌다가 희미해지는 느낌이다. 그의 추상 양식은 구상적이기도 하다.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무수한 해석 끝에 형태와 색을 추출하여 결합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따라서 제목과 함께 보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가 쉽게 연상된다. 1916년 이후 색과 하나 된 그의 그림이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케와 프란츠 마르크가 전쟁 중에 사망하였기에 클레는 명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것도 아니다. 우주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의 총체이고,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주사위를 던지면 실현되는 것은 하나의 눈이지만, 주사위에는 실현되지 않은 다섯 개의 가능성이 있다."


<우주적 구상(1919)>

회화와 음악의 벽을 무너뜨리려 했던 클레의 우주관이다. <우주적 구상>은 9차원 공간이 요구되는 끈 이론을 대입한 해석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유일하지 않고, 상대적"이라는 클레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낸 듯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우주팽창론’ 정도에서 단서를 찾고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초기 끈 이론이 1968년에 등장한 반면, 프리드만의 우주 팽창론은 작품 제작 시기에 근접한 1922년이기 때문이다. 빅뱅에 의한 우주팽창론은 우리 우주의 생성과 소멸만 다룬다면, 끈 이론은 영원히 성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많은 순환적 우주를 서술한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선 직관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중앙의 원을 초기 우주라고 보면, 폭발하는 형상이다. 물질의 결정체(입자 혹은 초끈)가 공간으로 퍼지면서 달과 별(항성과 행성)이 만들어진다. 아래로는 건물과 나무로 다리가 놓이면서 지구 위에 가시적인 세상이 탄생했다. 그런데 중앙을 향하는 화살표는 중력일까? ‘붓으로 우주를 서술하는 물리학자’ 클레의 작품이다.


클레는 1920년부터 칸딘스키와 함께 바우하우스 교수로 재직했다. 바우하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융합하고 미학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바탕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그는 예비과정 학생들에게 이론, 직물과 유리 회화를 가르쳤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내 갈등이 심해졌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사임하였으며 결국, 폐쇄 후 나치 간부들을 위한 학교로 바뀌었다. 클레는 1930년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하지만 1933년 예고 없이 해임되었다. 나치로부터 ‘갈리시아(Galicia, 스페인 북서부의 지방) 출신의 유대인’이라고 낙인찍힌 이후의 조치였다.

그는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독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지만, 유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국에서도 우회적인 비난만 있었지 혈통과 관련해 그에게 어떤 자료 요청도 없었다. 클레는 이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차라리 변명하지 않고 견디기로 했다. 이후 조부모 출생증명서를 제출했음에도 ‘국가를 위해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보증을 요구하며 공직에서 추방했다. 그런데도 그는 독일에서 계속 지내려 했다. 그러나 1933년 12월 베른으로 이주하여 스위스 국적 취득을 신청했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화가들에 대한 나치의 강압이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1937년 뮌헨을 시작으로 순회 ‘퇴폐 미술전’에 그의 작품 17점이 전시되었으며, 대중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작품 102점이 몰수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도 그의 추상미술은 정치적으로 좌파와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여 국적 취득이 지체되었다. 그는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했다. 1937년에 264점을 비롯하여 1938년 489점, 1939년 1,254점을 그렸다. 그의 작품에 유머와 재치가 여전했다.


클레 무제 정물화 1940.png <무제(無題 혹은 정물, 1939)>

“이 세상이 끔찍할수록 예술은 더욱 추상화되고, 그에 반해 세상이 살 만하다면 예술은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클레는 추상의 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럼, 이 작품 <무제>는 어떤 세상에서 태어났을까? 반쯤은 살 만한 세상이었을까? 어두운 배경이지만, 사물을 비교적 알아볼 수 있게 그렸다. 오른쪽 원형 테이블 위로 꽃잎이 뿌려져 있고, 초록색 주전자와 조각품이 나란히 놓였다. 왼쪽 상단에는 빨간색 반원 위로 꽃과 화병, 원주 모양의 막대가 그려 있고 그 중간에 둥근달이 떴다. 왼쪽 전경의 ‘천사’가 남다른 의미가 있는 듯하다. 클레가 여러 번 반복했던 드로잉으로, 1940년 뒤늦게 <천사, 여전히 추한 모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인 1939년에 그렸다. 12월 1일 예순 번째 생일날, 그림 앞에서 그가 사진을 찍었기에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서명하지 않고 이젤에 놓인 채 클레는 1940년 6월 8일 로카르노 병원으로 옮겨졌다. 피부 경화증이 악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6년을 기다렸던 스위스 국적 취득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인 6월 29일에 생을 마감했다. 따라서 제목이 따로 없어 보통 <정물>이라 불리는 이 작품이 유작인 셈이다. 일기를 꼼꼼히 써 왔던 그였지만,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어떤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죽음을 예견하며 그렸을지도 모를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 놓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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