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의 탄생, 칸딘스키

by 노인영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다재다능했다. 여덟 살에 첼로를 배웠고, 열 살에 소묘를 시작했다. 유년 시절부터 예술적 소양과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정작 대학에서는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했다. 스물여섯 살에 법학 시험을 통과하고 타르투 대학의 교수 제의를 받을 정도였다. 러시아 민속 문화를 공부하며 문학과 시, 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심 끝에 화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1895년 나이 서른 살 때 그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두 가지 사건이 결심을 도왔다. 첫 번째 사건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전에서 모네가 지베르니의 집 근처에서 그린 <건초더미>를 보았다.

모네의 <건초더미(1891)>

“나는 오직 러시아 사실주의 미술만을 알고 있었다. (···) 갑자기 처음으로 나는 어떤 ‘그림’을 보았다. 도록은 그 작품이 <건초더미>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보기 힘들어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또 화가가 그렇게 불분명하게 그릴 권리가 없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에 지울 수 없이 새겨졌고, 가장 작은 세부들까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몰랐던 나의 예상외의 힘이 팔레트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모든 꿈을 능가했다.” (칸딘스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면, 눈 덮인 세상이 단순히 흰색이 아니다. 햇빛에 따라 다양한 색의 변화를 서술했다. 규격에 얽매인 색을 택해 왔던 그로서는 처음으로 ‘그림다운 그림’을 보았고, 마술 같은 색채의 미학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국립 극장에서 열린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 그린> 공연이었다. 색들이 눈앞에 떠올랐고, 미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음악이 지닌 질서와 같은 힘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회화에 전적으로 몰입했다. 이듬해인 1896년이 되자 국제적 예술도시인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안톤 아츠베 미술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초기에는 화려한 색상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얻은 영감을 주제로 구상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선명한 색채를 활용하여 감정 표현의 영역을 확장했고, 드디어 추상 미술이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시절, 독일 뮌헨의 유겐트슈틸(Jugendstil)에 몸을 던졌다.


칸딘스키 교회가 있는 산 풍경 1910.png <교회가 있는 산 풍경(1910)>

추상화란 풍경, 인물을 비롯한 구체적인 대상을 닮지 않았다.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이런 맥락에서 사실주의 회화가 추상화와 가장 먼 양식이다. 물론 구상화로도 인간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추상화는 음악처럼 감성에 직접 호소한다. 그리고 종교, 예술적인 감정 등 정신적인 것에는 원래 형상이 없다. 따라서 칸딘스키는 신앙심이 사라지고 예술마저 상업성과 배금주의에 오염된 세상에서 정신적 가치를 구현하려고 추상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추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08년 무르나우 시절부터 그는 풍경화에서 빨강과 노랑, 파랑과 초록의 강렬한 조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밤이 짧아지던 어느 날 아틀리에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내면의 빛으로 뒤덮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거꾸로 놓인 자신의 풍경화(<시골 교회(1908)> 혹은 <탑이 있는 풍경(1909)>으로 추정)에서 느낀 생경함이다. 이것은 대상이 구체적 형태와 색채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발견이다. 더불어 자신이 지금 바른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표현주의에서 추상 회화로 이동했다. 나아가 입체파의 형태와 야수파의 색채 해방을 뛰어넘어 작품에서 주제를 추정할 수 있는 대상의 어떤 기호나 암호를 배제하는 도발을 감행할 수 있었다. 볼프디터 두베는 당시 칸딘스키의 감동을 전달하면서 작품 한 점을 소개한다. <교회가 있는 산 풍경>이다. 주제와 동떨어진 풍경화란 의미와 그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인상 Ⅲ(콘서트, 1911)>

음악은 듣는 것이지만,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화가가 바로 칸딘스키다. 청각적 리듬을 시각적 색채의 조화로 나타냈다. 색채나 소리 모두 전자기파의 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은 같다.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대략 380~780nm(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 사이의 파장을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 할 뿐이다. 칸딘스키는 어떤 음을 들으면 그에 상응하는 색을 떠올릴 수 있는 화가다. 예술 분야 중 가장 비물질적인 음악이 온전히 영혼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추상 미술과 통한다고 믿었다.

1911년 1월 2일, 쇤베르크 무조(無調, 장조나 단조의 규칙이 없는) 음악을 들었다. 세 개의 피아노곡에 감명받은 그는 다음 날 캔버스에 이를 표현했다. 중앙의 검은색 덩어리(피아노)에서 발생한 노란색이 공격적으로 화면을 지배한 작품 <인상 Ⅲ>다. 이렇게 그는 회화가 현실에서 색과 형태를 모방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됐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 역사>) 청기사 모임의 이론적 기반이 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그는 미술을 음악으로 이렇게 비유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색은 영혼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여,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건반 하나하나를 치면서 영혼에 진동을 불러일으키는 손과 같다.”


칸딘스키 구성 6.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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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포지션 Ⅵ과 Ⅶ(1913)>

이 책 서두에서 칸딘스키는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각 시대의 문화는 결코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예술을 창출해낸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파장을 색으로 옮기면서 ‘현대 추상미술의 창시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선물 받았다. (제목 그림은 <황, 적, 청(1925)>)

그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제거해가는 순서에 따라 <인상>, <즉흥>, <구성(컴포지션)>으로 유형화했고, 그중 <컴포지션>을 추상화의 최고 단계로 설정했다. (사카이 다케시, <니체의 눈으로 다 빈치를 읽다>) 추상화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10년 비재현적인 최초의 작품 <무제, 수채화로 그린 첫 번째 추상)>을 완성했고, 같은 해 <컴포지션 Ⅰ>이 탄생했다. <콤포지션>은 10점 정도만 완성되었는데, 그중 7점을 1913년 이전에 그렸다. 대작 <컴포지션 Ⅵ과 Ⅶ>을 그린 1913년을 칸딘스키의 정점으로 간주한다.


<컴포지션 Ⅷ(1923)>

이에 반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의 기하학의 시대(1920~1933)에는 <컴포지션 Ⅷ>이 있을 뿐이다. 여기엔 원, 반원, 삼각형, 격자 모양 등 다양한 기하학적 도상이 차가운 배경 위에 쌍방향, 혹은 역동적으로 흩뿌려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모양은 캔버스 왼쪽 상단 코너에 그려진 커다랗고 검은 동그라미다. 그것은 작은 동그라미들을 위한 기준점 역할뿐 아니라 날카로운 직선과 삼각형과 강력한 대조를 유발한다. 그의 영적·심리적 효과까지 조직적인 방식으로 적용한 첫 번째 작품이다. (스티븐 파딩,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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