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화가가 본 전후 독일 사회

신즉물주의 막스 베크만의 <밤>과 게오르게 그로츠의 <사회의 기둥>

by 노인영

베를린 분리파의 주요 멤버였던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1884~1950)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혼란 중에 독일 미술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급진적인 화풍을 추구하지 않았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내적 충동을 차분히 그려냈다. 제1차 대전 당시 야전병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했던 그는 신경쇠약을 일으켜 1년 만에 전역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생활(이혼) 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과거와 단절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맞는다. 표현주의, 입체주의, 신즉물주의 등 다양한 양식을 넘나들었다. 정신착란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피폐해진 내면을 끝없이 탐구하면서 200여 점 가까운 자화상을 남겼다. 전쟁 전 추구했던 역사화라는 표현 수단은 그대로 유지했다.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형태를 왜곡하고 물감이 묽어졌지만, 윤곽선이 짙어졌다. 참혹함을 과장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밤(1919)>

그중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을 뛰어나게 묘사한 작품 중 하나가 <밤>이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7일 전인 1918년 11월 4일, 독일 킬(Kiel)에서 해군 반란이 일어났다. 해군 지도부에서 실패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튀링겐 호와 헬고란트 호 수병 1,000여 명이 용감하게 반발했고, 육군 병사와 노동자가 호응하면서 혁명으로 발전했다. 5일 뒤 베를린에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국왕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11월 9일 뮌헨에서 ‘바이마르 자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듬해 2월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했고 사회민주당 간부들이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러나 종전이 성립되었음에도 영국은 이후 7개월 동안 독일에 대한 봉쇄를 풀지 않았다. 증오심과 복수로 밖에 해석될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독일 전(全) 국민이 무서운 기근으로 고통을 받았다. 게다가 온건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사민당(SPD)으로부터 분리(1919년 1월)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부 요청으로 이를 진압한 황제시대 장교들이 지휘하는 '자유군단'이 다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정부군인 국민방위군은 관망만 했고,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선언하며 쿠데타를 저지했다. 이때 베크만은 <밤>을 통해 폭력과 혼란, 그리고 암살까지 흔히 행해지던 당시의 상황을 드라마처럼 한 장면으로 폭로했다.


일단 공간이 매우 좁다. 작은 다락방에 지나치게 많은 인원을 배치함으로써 그 자체가 고통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다리를 벌려 캔버스를 양분한 여성이다. 뒷모습이지만, 벌거벗고 손이 묶인 채 다리가 지나치게 벌어진 것으로 보아 고문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빨간 스타킹은 그녀의 신분을 암시한다. 오른편에서 다른 여자를 들어 창문 밖으로 내던지려 하는 사내가 담당 고문기술자 같다. 챙 있는 모자를 내려쓴 콧수염을 달고 있는 모습은 이탈리아 피사의 캄포산토에 있는 프레스코화 <죽음의 승리> 속 걸인을 변형하여 그려 놓았다고 한다. 나머지 두 명은 나무판 위에 사내 한 명을 올려놓고 목을 조이고, 손을 비튼다. 넥타이를 매고 파이프를 문 여유 있는 모습에서 노련한 전문가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러고 보니 목 졸린 사내의 오른발 혈관이 훼손되었고, 그 고통으로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고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의 적막함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탁자 아래 배치된 축음기와 편안하게 엎드려 있는 고양이 뒷모습이 그 이율배반을 설명한다. 오직 마룻바닥에 불이 꺼진 채 쓰러진 양초와 기울어져 위태한 촛불만으로, 이곳이 생과 사가 갈리는 현장임을 깨우쳐준다. 베크만은 말했다.


“예술이 창조적인 이유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지 오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술의 창조성은 현실의 변형이 목적이지 유희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평생 파고들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탐색입니다.”


막스 베크만 카니발 1920.png
막스 베크만 가면무도회 전 1922.png
<카니발(1920)>과 <가면무도회 전(1922)>

1923년까지 그는 <카니발>, <가면무도회 전>처럼 밝은 조명 아래 기괴하고 침울한 어릿광대의 연극 무대를 꾸몄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단절되었으며, 무수한 소품이 있음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쩔쩔매고 있다. 이같이 베크만은 단호하고 정적인 배치, 차가운 스타일의 세부 묘사를 통해 대상을 뚜렷이 드러내고, 내면의 다급한 감정을 통제하고자 했다. (볼프디터 두베, <표현주의>) 이런 감상적인 성향을 배제한 베크만의 병적인 표현주의는 1920년대 중반 국제적 명성을 얻으면서 신즉물주의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히틀러의 파시즘 정권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 교수 직위에서도 물러났고, 퇴폐적 화가로 매도되어 작품 500여 점을 압류당했다. 1937년까지 독일에 살던 그는 결국,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1947년 미국으로 들어갔다. (제목 그림은 막스 베크만의 <파리의 사교계(1931~47)이다) 세인트루이스와 뉴욕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시 안정을 찾는다. 그림의 형태와 색채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20년 연하의 뮤즈인 마틸데와 재혼하고, 미국에서 지내면서 내면이 한결 밝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힌 또 다른 신즉물주의 화가가 게오르게 그로츠(George Grosz, Georg Ehrenfried Gross, 1893~1959)다. 전후 망명자와 추방자의 집합소였던 베를린에 현대화 운동이 일어났다. 진원지는 베스텐스 카페였다. 오스카 코코슈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그리고 수많은 미래파 예술가, 구성주의자, 다다이스트와 함께 문학 평론지 <슈투름>을 결성한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1920년에 베스텐스 카페가 가격을 대폭 올리자 사람들은 모두 ‘낭만 카페’로 옮겨갔다. 그로츠는 부츠에 박차까지 완벽하게 갖춘 미국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카페에 들이닥치곤 했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게오르게 그로츠 사회의 기둥 1926.png <사회의 기둥(1926)>

제1차 대전 참전했던 그는 1920년대 독일이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직감했다. 사람들이 음탕함과 아편, 광기, 무질서를 탐닉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캐리커처와 사실주의를 결합하여 <사회의 기둥(1926)>을 그려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부패하고 무지한 독일인을 풍자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기 7년 전 작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인 반동과 군대의 야합을 주제로 다섯 계급을 담았다.

맨 앞의 정장 차림의 외알 안경을 낀 나이 든 남자 보인다. 손에 펜싱 검과 맥주를 들었고, 뺨의 상처는 전쟁을 치른 흔적이다. 머리 위 돌격 자세로 서 있는 창기병들은 그가 꿈꾸는 영웅상으로, 앞뒤를 안 살피는 ‘전쟁광 민족주의자’를 상징한다. 넥타이에 ‘하켄크로이츠’가 새겨 있는 걸 보니 나치당원이다.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쓰고, 손에 신문과 망치를 잡고 있는 이는 알프레드 후겐베르크다. 반유대주의자로, 신문재벌이며 나치당의 후원자였다. 피 묻은 종려나무 잎이 그가 말하는 평화가 위선이라고 말한다. 알코올 중독인 듯 코와 뺨이 벌겋고, 머리에 똥만 찬 오른편 인물은 사민당 국회의원이다. 공화국 국기가 아니라 독일 제국 국기를 들고 있고, 착취자의 구호 '사회주의는 노동이다'라는 메모지를 목에 걸고 있다. 성직자도 보인다. 술에 만취한 채 축성하는 제스처를 취해보지만, 앞을 제대로 못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위로는 제국 훈장을 단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피 묻은 칼과 권총을 겨누고 있다. 집은 불타고 있는데.

<황혼(1922)>

항복 선언서가 발표되던 날, 아돌프 히틀러 상병은 군 병원에 누워 있었다. 겨자 가스로 반 실명 상태였던 그는 항복 선언이 조국을 욕보인다며 얼굴을 베개에 묻고 흐느껴 울었다. 1918년 9월 27일에도 여전히 군 게시판이 전하는 독일의 승승장구하는 소식을 믿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마르 정부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1923년 8월 수상이 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루르 파업을 종식시키고 국가 토지를 담보로 새로운 지폐를 발행했다. 연합국도 현실에 맞게 독일 배상액을 다시 결정했다. 경제는 호황으로 돌아섰다. 1928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나치는 500 의석 가운데 겨우 12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1929년 미국이 경제공황으로 돈줄을 끊자 독일 경제가 재차 붕괴하면서 나치당이 급부상했다. 1930년 1월 한 달 동안 독일의 실업인구는 150만 명에서 250만 명으로 치솟았다. 4월까지 베를린에서만 70만 명, 그리고 1931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400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했었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37.4%의 지지를 받아 총 640석 중 230석을 차지하고 드디어 국회 제1당으로 올라섰다.


나치는 그로츠의 그림을 퇴폐 미술 중에서도 가장 퇴폐적이라고 규정했다. 1933년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면직되자 결국, 그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독일의 종말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기뻐했을까? 미술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은 그는 1952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지만, 6주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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