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의 성(性)과 죽음

by 노인영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 빈은 유럽에서 가장 신속하게 성장한 대도시였다. 그러나 파리와 브뤼셀처럼 구시가를 허물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에 파묻힌 도시이기도 했다. 황제와 귀족의 힘에 크게 의존했기에 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보수적이고 형식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부르주아가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귀족의 힘을 깨뜨렸지만, 빈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농부와 가난한 시민은 하루라도 빨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1900년부터 1991년까지 350만 명의 합스부르크 시민이 미국으로 떠났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수였다. 게르만족, 마자르족, 남슬라브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나뉘어 결집력을 상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도 러시아군을 제외하고는 이곳 군대만큼 탈영병이 많은 곳은 없었다. 포로로 잡힌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인(220만)이 영국군(17만)보다 12배 많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돌프 히틀러가 빈에서 18세부터 24세(1907~1913)까지 6년간 지냈다. 집 없는 극빈자였고, 성공 가능성이 없는 공상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정치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오직 하나의 목표,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밖에 없었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소묘교실에서 본 풍경(1905)>

당시 오스트리아 3대 화가는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그리고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였다. 열다섯 살 실레가 그림 공부할 때의 작품을 보면, 따르던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양식에 충실한 채 선과 색채를 왜곡하지 않고 밝게 그렸다.

그러나 코코슈카의 희곡 <살인자, 여성의 희망>을 발표되던 해인 1907년에 클림트를 만나면서 변화가 찾아온다. 클림트는 실레가 드로잉 교환을 제의하자 “드로잉은 네가 더 낫다”며 즉석에서 응했다. 이후 그의 드로잉을 사주고, 모델을 주선하고, 미술공예 운동을 전개하던 요제프 호프만을 소개해 주는 등 감동을 선믈했다. 실레는 클림트를 당대 최고의 화가라 여겼다. 그리고 전통주의 방법을 고수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리펜케를과 결별하고 빈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했다.

<추기경과 수녀(애무, 1912)>

1909년 ‘뉴 아트 그룹’을 결성한 그해 클림트의 초청으로 ‘쿤스트샤우(Kunstschau) 기획전’에 출품하면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때 만난 앙리 마티스, 뭉크, 피에르 보나르, 얀 투롭, 고흐 등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캐리커처와 같이 선과 색채를 변형했으며, 뭉크처럼 사물의 밝지 못한 이면을 드러냈다. 특히 누드화에서 인간의 에로티시즘을 폭로했다. 클림트의 관능적 표현에 비해 그의 누드는 더욱더 직접적이고 과격하며 내면을 담았다. 당시의 금기를 무참하게 부숴버리는 파격적 누드로 오히려 저급함을 극복했다.

이 말은 클림트의 <키스>를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추기경과 수녀>를 보면, 무슨 의미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실레는 작품에서 추기경을 성적 욕망의 '에로스(Eros)', 수녀를 죽음의 충동 '타나토스(Thanatos)'를 상징했다. 성과 죽음은 실레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던 주제이다. 인류를 포함한 동물에게 종족 보존의 본능은 성적 본능과 맞닿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 삶의 본능을 에로스, 반대편에서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한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라 했다. 먼저 태어난 형제 세 명이 죽었다. (추정) 툴른 역장이었던 아버지가 정신병을 앓다가 쉰네 살에 사망했으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사이도 없이 어렵게 가계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는 진로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평생 미워했다. 이러한 내면이 그의 작품에서 사랑, 즉 성과 죽음이 교차하는 원인으로 평생 작동한다. (제목 그림은 대표작 <포옹(1917)>이다)


그는 회화가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종종 배경을 없애고 인물에게 집중토록 했다. 그 인물은 깡마르고 각진 육체와 길이를 과장하는 기형적인 모습이었다. 구스타브 쿠르베와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성기를 노출하고 성도착적인 제스처를 거칠게 드로잉했다. 모두 강렬한 회화를 추구하는 데 따른 결과물이었다. 어렸을 때 네 살 어린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누드 그림을 그렸다. 게르티는 실레를 화가로써 신뢰하였으나 아버지는 세간의 수근거림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누드를 향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스물한 살 때 열일곱 살 소녀 발레리 노이질(Valerie Neuzil)을 만나 4년간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노이질은 실레의 에로티시즘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좀 더 자유스러운 환경을 찾아 어머니의 고향 체스키 크룸로프(크루마우)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마을에서 쫓겨났다. 1912년 빈 외곽 노이렌바흐(Neulengbach)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했는데 여기서 문제의 사건이 발생했다. 가출한 소녀 한 명이 그의 집에 머물려고 하여 거절하였으나 오해가 생겼다. 실레는 미성년자 유인 등의 혐의로 3일간 모두 24일간 옥중 생활을 했다. 그는 일기를 통해 당시 느꼈던 분노를 드러냈다. 유괴로 오해했다면 억울한 일이고, 외설적인 작품 활동에 대한 경고라면 전례가 없던 일로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에로틱한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을 드러냈다.


“상스러운 작품에 예술적 독특함이 있다면 그것은 외설이 아니다. 그것이 외설이 되는 것은 단지 관람자가 상스러운 인간일 때만 그러하다.” (에곤 실레, <세상의 하이페리온>)


클림트 프리드리케 비어의 초상 1916.jpg
에곤 실레와 클림트의 프리드리케 비어의 초상(1914/1916)

그러나 이 사건으로 실레는 오히려 유명해졌다. 컬렉터 중에는 그로부터 더욱 외설스러운 작품을 찾는 이가 많아졌다. 이제 그의 그림 온건(?)해졌다. 그중 더 온건한 <프리드리케 비어의 초상>이 재밌는 건 클림트도 같은 이름의 작품(1916년 작)이 있다는 사실이다. 프리드리케가 두 사람 모두에게 작품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엄청나다. 에곤은 600크라운, 클림트는 2만 크라운으로 무려 30배가 넘는다. 그러나 당시 빈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금메달 포도주 한 병이 2크라운이었으니 에곤 실레의 작품도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프리드리케는 신예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도 초상화를 주문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다. 좋은 볼거리를 놓쳤다.


<죽음과 여인(1915)>

그는 1915년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에디스 하름스와 결혼했다. 현명한 그녀는 화가 실레의 도덕성을 믿었다. 그래서 결혼 전 노이질을 만났다. 그녀에게 관계 정리를 부탁했고 노이질은 사모했던 실레의 곁을 순순히 떠났다. 이때의 감정을 옮긴 작품이 그의 대표작 <죽음과 여인>이다. 그녀와의 작별을 죽음처럼 우울하고 끔찍한 고통으로 그렸다. 둘은 마지막 포옹을 하고 있지만, 마주보지 않은 얼굴에서는 애정이 사라졌다. 실레는 멍하니 아쉬움을 담고 있으며, 그녀는 무표정하다. 결정적인 상징은 사내를 껴안은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팔이다.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감정을 옮긴 듯하다. 불행한 여인이었다. 이후 그녀는 적십자 간호병으로 근무했으나 스물세 살 젊은 나이에 성홍열로 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설마 다가오는 그녀의 죽음을 예감하고 실레가 이렇게 표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가족(1918)>

실레는 결혼 후 나흘 뒤에 징집되어 오스트리아 남쪽 뮐링에 있는 러시아 병사 포로수용소에서 서기로 근무했다. 다행히 화가임을 안 상관이 그를 위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저장소 하나를 내어주었다. 1917년 1월부터 빈에서 복무했다. 뮐링에서는 8점을 그렸는데, 이곳에서는 13점의 유화와 많은 드로잉을 남긴 것으로 보아 전쟁과 상관없이 창작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오스트리아를 이끄는 예술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의 드로잉 가격은 세 배로 뛰었고,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에디스의 초상을 3,200크라운에 구입했다. 이렇게 안정을 찾아갈 때 그린 그림이 바로 <가족>이다.

이제 모델은 더 이상 여위고 병들어 있지 않다. 절망이 사라졌으며, 평온하다. 작품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그해 10월 에디스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미리 그려 놓았던 작품 속 배 속 아기도 함께 잃었다. 그리고 병간호에 지친 실레도 사흘 후인 10월 31일 새벽 1시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실레의 나이 불과 스물여덟 살 때 닥친 불행이었다. 그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정도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여섯 개의 국가로 분리, 새롭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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