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과 아방가르드

전쟁은 왜 발칸 지역에서 발발했을까?

by 노인영
황태자 부부 살해범 가브릴로 프린치프 혹은 페르디난드 베흐 체포 현장

1914년 6월 28일 오전 11시,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총을 쏘았다. 이곳을 합병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암살의 배후로 세르비아를 지목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7월 28일, 전쟁이 발발했다. 동맹 관계를 형성했던 열강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쟁의 급물살에 휩쓸렸다. 막상 전쟁이 개시되자 독일 빌헬름 2세(재위 1888~1918)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이 프랑스-러시아 편에 섰다. 영국은 러시아가 전쟁(1904~1905)에서 일본에 패한 차제, 유럽의 균형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은 독일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망설이던 오스만 제국은 뒤늦게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다.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의 충돌로 표현한다. 하지만 최초 전선은 식민지 지역이 아니라 의외의 발칸 지역에 형성되었다. 그것도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식민지가 없던 오스트리아가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럽 열강 중 영국은 이미 식민지 개발에 저만치 앞서 있었다.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북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중에서도 이집트에 영향력이 컸다. 프랑스 역시 인도차이나 대부분과 모로코를 비롯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만족을 모르던 양국은 독일 해군의 확장을 꾀하는 빌헬름 2세의 야심을 견제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도이치 제국은 1871년 1월 18일 탄생과 동시에 유럽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재상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중공업 중심의 산업을 추진했다. 식민지가 절대 부족한 독일이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를 앞설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럽은 물론 그들의 식민지가 필요로 하는 철도 부설 등 중공업 수요를 흡수했다. 그러나 젊은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마자 비스마르크를 물리쳤다. 그는 공격적으로 3B(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드)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아시아 지배를 노렸다.


1914년 당시 열강의 동맹 체제(출처; 위키 백과)

백발의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가 이끄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오스트리아는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이탈리아 왕국이 통일 과정에서 중부 교황령과 함께 북부 오스트리아 점령 지역을 회복하자 다급해졌다. 독립하겠다는 헝가리에 자치권을 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건설했다. 사실 유명무실한 제국이었다. 제국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1882)을 맺고, 함께 게르만 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오스트리아 내 소수 민족 마자르족과 남슬라브족이 긴장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슬그머니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발칸 반도(보스니아)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들에겐 식민지 개척을 위한 유일한 진출로였으나 슬라브주의를 앞세워 이 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와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러시아가 독일과의 관계를 끊고 프랑스, 영국과 삼국협상(1907)을 맺었고,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을 버리고 일본과 손을 잡았다. 언제, 누가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느냐는 문제만 남았을 뿐 열강 모두 충돌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열강들은 신질서(빈 체제, 1815~1848)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르네 알브레히트 까리에, <유럽 외교사/상>)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국왕의 절대 안전이었고, 차선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the balance of power)’이었다. 그 사이 발칸에서는 ‘1 민족, 1 국가주의’의 광풍이 몰아쳤다. 민족주의를 수출한 프랑스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제국과 맞서는 방어기제((防禦機制)였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내부 단결 과정에서 다른 민족에 대한 거친 증오심을 드러내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게다가 배타적인 신앙심과 결합하여 그간 평화롭게 함께 지내던 이웃 간 심각한 파열음을 일으켰다.

한편 발칸을 지배하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한때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지배한 강국이었다. 그러나 1571년 레판토 해전과 특히 1683년 제2차 빈 포위 공격이 실패한 이후 군사력에 있어서 유럽에 뒤졌다. 러시아가 앞장섰다. “무슬림 제국 아래에서 정교를 믿는 슬라브 민족을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1699년 흑해 연안까지 진출했다. 표트르 대제(재위 1689~1725)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통치하에서 더 강성해진 러시아는 크림 전쟁(1853~1856)을 일으켰다.

오스만은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의 도움으로 간신히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국을 도와 승리를 이끈 영국은 이집트와 키프로스(사이프러스)를, 프랑스는 알제리와 튀니지를 각각 차지했다. 이 무렵 비잔틴 제국의 적자임을 자처해 온 그리스가 1829년 발칸 지역에서 가장 먼저 독립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지배해 온 오스만 제국을 ‘이교도의 민족 국가’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먼저 그리스를 도왔다. 이어 서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을 약화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귀족 시인 바이런 경이 메솔롱기온에서 목숨을 바쳐 힘을 보탠 독립전쟁이었다. 반면 유럽의 신질서 빈 체제가 금이 가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1875년에는 보스니아가 봉기했고, 같은 슬라브계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제국에 선전 포고했다.


러시아 오스만 제국의 크림 전쟁.png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크림 전쟁 일부(사진 출처; 위키 백과)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라 조롱했던 러시아가 다시 전쟁(1877~1878)을 일으켰다. 제국은 패전을 거듭했고, 수도 이스탄불까지 함락될 위기에 빠졌다. 러시아의 몸집이 더 커질 기세였다. 그러자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양국의 대표를 초대하여 베를린 조약을 체결했다.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했고 불가리아는 자치령이 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완충지대로서 중요해졌다. 비스마르크는 이곳의 통치를 게르만 형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위임했다. 빈손으로 돌아선 러시아는 불만이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들어서는 첫 길목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아예 보스니아 일대를 합병해 버리자 발칸에 격랑이 다시 일었다.

러시아의 충동질로 1912년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 힘은 먼저 명목상 보스니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사용했다. 제국은 이스탄불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은 동맹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영토 분할에 불만이 높았던 불가리아가 돌연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패했고, 그나마 1차 발칸 전쟁 때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이것이 불가리아가 제1차 대전에서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동했다. 두 차례 발칸 전쟁을 치르면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 영토의 83%, 인구의 69%를 잃었다. 이곳이 이렇게 격렬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이들이 민족주의와 함께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기독교 국가들의 신앙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한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전사한 독일군 병사.png
191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군인에 의해 처형되는 세르비아 병사.png
솜 전투(1916)에서 독일군 병사의 죽음과 191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의해 처형되는 세르비아군 포로

제1차 세계대전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을 믿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를 도왔다. 동맹국들은 편을 나눠 전투에 참여했다.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7,0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싸웠다. 그중 940만 명(13.5%)이 목숨을 잃었고, 1,540만 명이 다쳤다. (헤이르트 마크, <유럽사 산책 1>)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1918년 11월 11일 “목전에 있던 독일의 승리가 등에 칼을 맞고 죽었다.” 4년 4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종전이 찾아왔다. 연합국은 이듬해 6월 28일 새로 탄생한 독일 공화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백지 수표’를 건넸던 독일에 있다고 규정지었다. 응분의 대가로 독일은 1870년 프랑스에서 탈취한 영토와 모든 식민지를 빼앗겼고, 막대한 금액의 배상금을 매년 전승국에 지불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도 치명타(군인 280만 명 중 32만 5천 명 전사, 민간인 사상자 200만 명)를 입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해체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내용 중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르바키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핀란드가 독립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패전국 치하의 지배를 받던 나라뿐이다. 승전국 지배 아래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는 베제되었다. 심지어 연합국에 협조한 인도와 중국도 배신을 당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까지 독립을 미루어야 했다.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특히 영국은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 중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함으로써 북쪽 이집트부터 남쪽 희망봉을 관통하는 대제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차 대전의 연결선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그래서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양대 전쟁을 묶어 ‘20세기의 31년 전쟁’이라고 했다. 이때 역시 전후 식민지 처리 과정에서 화약고가 발칸반도에서 중동으로 옮겨온다. 결국, 그들만의 이권 투쟁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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