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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22. 2021

로마 르네상스와 3차 이탈리아 전쟁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립

로마의 르네상스 미술


로마의 르네상스 미술은 피렌체의 자극으로부터 출발했다. 교황 유니게우스 4세가 피렌체에서 8년을 머물렀을 때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를 유심히 본 후 1446년 그를 로마로 초빙했다. 그러나 이듬해 영면에 들어감으로써 그는 후임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이르러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인문학자이기도 한 교황은 메디치 도서관 첫 번째 관장을 역임했고,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던 인연을 갖고 있다. 교황은 먼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프리드리히 3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집전하였다. 로마에서 거행한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마지막 대관식이었다. 이어 교황청의 재정을 불렸으며, 우물과 물탱크에 의존했던 가난한 로마 시민을 위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로 하여금 트레비 분수의 전신인 간소한 수돗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니콜라오는 '기독교 세계의 수도' 로마에도 르네상스 정신을 불어넣고 싶었다. 인문주의 학문을 이단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킬 것이라 믿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그리스 학자들을 데려왔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필사본을 포함해 9만 권의 서적을 구출하여 이를 소장할 바티칸 도서관 설립했다. (<위키 백과>) 이어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을 본 따 바티칸 성당 벽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려 했다. 자신의 개인 예배실에서 시작한 프레스코화는 바티칸에서 최초이자 프라 안젤리코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후 후임 교황들도 점점 분량을 늘려갔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서 빛이 바랬다. 그는 라틴 국가들의 힘을 모으지 못했다. 제노바, 베네치아, 나폴리와 함께 10척의 교황령 함선을 보냈으나 한발 늦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교황은 이 사건이 기독교 세계와 그리스 문학 모두의 참사라고 생각했다. 1455년 3월 24일 니콜라오 5세는 통풍으로 선종했다.

라파엘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1511~1512)>

로마의 르네상스 미술이 전성기를 맞은 때는 건축가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가 활동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시대이다. 그는 식스토 4세의 조카이다. 앞서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와 식스토 4세와 갈등과 전쟁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는 강인하고 불 같은 성격이었다. 전쟁을 좋아하여 직접 야전으로 나갔다. 자신의 청동상을 제작하고 있던 미켈란젤로가 “손에 책과 성경 중 어느 것을 잡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거기에 검을 들리게. 나는 문인이 아니니까.” (로자 마리아 레츠, <르네상스의 미술>)


제3차 이탈리아 전쟁(캉브레 동맹 전쟁, 1508~1516)


율리우스의 성마른 성정은 교황령 지역 내에서 자기 영토의 확장을 꾀하고 종교의 세속화를 추진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용납할 수 없었다. 1508년 12월 프랑스 루이 12세, 에스파냐의 페르디난도,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과 잉글랜드, 헝가리까지 가세한 캉브레 동맹을 조직했다. 제3차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이다. 교황은 1509년 아냐델로에서 베네치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번엔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교황은 “베네치아의 멸망은 또 하나의 베네치아를 초래한다”라면서 힘의 균형을 위해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1510년 베네치아-교황령 간 동맹을 맺었고, 1511년에는 잉글랜드,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이 참여하는 신성동맹으로 확장했다. 이러한 교황의 이중적 태도는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어 발견되진 않는다. 영적 세계와 동떨어져 세속의 교황령 군주로서 보여주는 외교 행태이다.


1512년 전투가 흥미롭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영토 분할에서 밀려난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신성동맹에 맞섰다. 교황은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로 하여금 교황령 국가의 군대를 지휘케 했다.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그는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도망쳐 나와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하는 교황과 합류한 후 피렌체로 입성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해 9월 1일 메디치가는 18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피렌체로 복귀했다. 조반니 추기경의 동생 소(小) 줄리아노가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1513년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해 ‘문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귀천(歸天)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천 년 넘게 변방으로 취급받던 로마를 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세워놓고 싶었다. 물론 잦은 전쟁으로 속세의 군주로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했으리라. 여하튼 새로운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브라만테를 불러들였고, 미켈란젤로에게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 궁전 '서명의 방'을 장식하게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옛 모습 상상도(H.W. 브루워, 1891)과 현재의 모습

르네상스 미술은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예술은 영원하다. 전쟁은 육신을 날 세우게 하지만,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다독인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율리우스가 명분을 떠나 유서 깊은 옛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허문 것은 두고두고 아쉬워할 일이다. 


2년 후 1515년, 그것도 1월 1일에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위이자 조카뻘인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전쟁을 사랑했다. 곧바로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밑도 끝도 없이 밀라노를 점령했다. 이때 프랑수아는 선왕에게 등을 돌린 교황 율리우스의 배신을 징벌하려는 의도에서 교회의 자유헌장인 부르제의 종교 칙령을 폐기하려 했다. 

1516년 새로운 교황 레오 10세가 회담에 나서서 절충안을 마련했다. 이로써 주교 선정은 왕에게 일임하고, 교황은 서임권을 갖는 전통을 확립했다. 프랑스 교회의 희생을 담보로 양측 모두 막대한 수입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교회를 국가권력에 예속시킨 사례로 작동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여하튼 그해 교황의 주선으로 프랑스 누아용(Noyon)에서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훗날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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