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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18. 2021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1495~1497)>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알베르티의 원근법을 보완하여 세 종류, 즉 선 원근법, 색채 원근법, 대기 원근법으로 구별했다. 이 작품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 뒤로 모이는 소실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선 원근법이다. 색채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물은 밝고, 배경은 어둡게 처리하여 조소(彫塑)적 형체를 나타내는 색채 원근법과 대기와 밝고 어두움과 거리와 관련한 변화를 대기 원근법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리오넬로 벤투리, <미술비평사>, 참고로 '조소'란 공간 속에서 입체로 만들어진 3차원 미술을 말하는데 조각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구성이다. 미술에서 '현대적'이라는 말은 시대를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주제에 접근하면서 독창적인 관점을 지녔을 때 적용되는 표현이다. 따라서 현대적인 <최후의 만찬>이 초상화 <모나리자>보다 규모나 서사에 앞서서 그의 대표작이라 꼽고 싶다. 이 프레스코화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 식당 벽에 그렸다. 이곳 수도사들이 긴 식탁과 연결된 곳에서 예수가 그의 사도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형태이다. 레오나르도는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춘 다른 ‘최후의 만찬’과는 전혀 다른 구도를 취했다. 열두 제자를 세 명씩 묶어 네 개 그룹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유다 혼자 다른 사도들과 떨어져 있는 경향에서 벗어나 함께 무리 지어 있다. 예수가 말한다.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이때 열두 제자가 보인 반응을 각각의 인물 특성에 맞춰 함축하여 표현했다. 사도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한편으론 불안하고. 베드로가 예수의 바로 오른편(감상자 입장에선 좌측)에 있는 어린 요한에게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알아보라' 한다. 요한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두 손을 모은 채 앞을 주시한다. 이때 베드로는 왼손으로 안드레이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려는 듯하다. 안드레아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놀라움을 표시하고, 유다의 몸이 뒤로 제켜지며 소금 그릇을 엎질렀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의 몸값으로 받은 돈주머니를 오른손에 꼭 움켜쥔다. 베드로는 우연인 듯 오른손에 든 나이프가 고립된 유다의 옆구리로 향했다.

아치형 채광창까지 포함한 <최후의 만찬>

이런 구도는 놀라운 긴장 효과를 조성하는 한편, 레오나르도의 의중을 둘러싸고 해석이 분분하게 만들었다. 만약 다른 작가처럼 유다를 따로 앉혔다면, 생기지 않았을 스토리다. 그뿐만 아니라 식당 북쪽 아치형 채광창과 연결하여 리듬감까지 고려했다. 채광창을 기준으로 보면, 무리를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식탁 양편 끝에 있는 제자들의 무리는 작은 아치의 채광창 아래, 예수를 포함한 중앙 그룹은 중앙 아치 아래 배치했다. 그리고 반원의 채광창에는 주문자 루도비코와 부인 베아트리체 데스테, 장남 마시밀리아노, 차남 프란체스코의 문장을 조합했다. 루도비코가 식당이 속한 수도원을 자신의 가족 묘지로 개축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처음에는 "천상의 예술이다", 혹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실험정신이 작품을 해쳤다. 프레스코화는 빠르게 단 한 번의 붓질을 해야 한다. 겹칠하면, 색칠이 들뜨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기름(아마인유) 대신에 달걀을 섞어 열로 녹여 만든 안료를 사용하는 템페라 기법을 써서 그림을 완성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곳은 습기 찬 곳으로, 몇 해를 가지 못해 벽 겉면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겼다. 복원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보존에 어려움이 컸다. 


그는 수학과 음악을 좋아했으며 해부학은 물론 기체역학, 동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무기체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루도비코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그는 "그림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이든"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예술가를 대하는 당시 밀라노의 미성숙한 인식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로렌초도 이 점을 고려하여 루도비코에게 보내는 소개장에서 레오나르도가 직접 만든 라이어(Lyre,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게 해보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실제 1482년부터 밀라노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미술은 부차적인 재능으로 치부되었다. 오히려 연주자나 발명가의 잠재력에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시대가 요구하던 다양성을 갖추었음에도, 그의 천재성이 한 방향을 지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면, 그렇다는 의미이다.


개인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노출되었다. 인체의 구조에 대한 관심만큼,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했다. 예술가로서 자존감이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작품의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일은 오로지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책임감이라는 측면을 간과했다. 벽화 <앙기아리의 전투>는 죽을 때까지 미완성이었다. 그는 조각 작업을 꺼렸다. 시(市)에서는 넘겨준 대리석 덩어리를 손도 대지 못한 채 남겨 두었다. (일부에서는 3년 뒤 미켈란젤로가 그것으로 <다비드>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정황상 오류인 듯하다) 

<스포르차의 기마상(그란 카발로)>은 10년 만인 1495년에 엄청난 규모의 진흙 원형만이 전시되었을 뿐이다. 루도비코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기마상에 사용할 청동 70t을 대포 주조하는 데 전용했다. 그나마 1499년 10월 루도비코의 집권은 종말을 맞았다. 프랑스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를 침입해 왔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기 위해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향해 출발했다. 직선적이고 매사에 치열한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의 기마상 문제를 조롱한 일화는 1503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발생한 듯하다. 당시 피렌체에 있었던 또 다른 천재 라파엘로는 <모나리자>를 보고 감동하여 그 형식을 십여 년간 빌려 사용했다. 또한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레오나르도와 시뇨리아 궁 프레스코화 작업을 경쟁하면서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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