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영 Sep 13. 2021

제2차 이탈리아 전쟁과 다 빈치

레오나르도의 <담비를 안은 여인>과 <모나리자>

제2차 이탈리아 전쟁(1499~1504)


1499년 루이 12세는 선왕 샤를 8세가 이루려 했던 나폴리 왕국의 영유권을 되찾고자 했다. 더불어 이번에는 밀라노에 대한 통치권까지 요구했다. 초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사후 가문의 대가 끊기자 사위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통치권을 계승했는데, 그의 아버지 루도비코가 작위를 찬탈했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잔 갈레아초의 아내 발렌티나가 자신의 (조부였던 오를레앙의 공작 루이 1세와 결혼한) 할머니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는 선왕의 우(愚)를 범하지 않으려고 밀라노를 침공하기 전 반도 내 우호 세력을 구축했다. 먼저 어제의 적이었던 에스파냐와 베네치아와 연대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였던 체사레 보르지아에게 발랑스 공작 작위를 주어 교황령 국가의 환심도 샀다. 그러자 동맹에서 유일하게 남은 나폴리 왕국의 발이 묶임으로써 밀라노가 고립됐다. 1500년 4월, 밀라노가 루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8년간 로쉬 성에 연금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피렌체의 사보나롤라에게 파문을 내렸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령 국가의 영역을 확장코자 프랑스와 기꺼이 연합했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하여 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불렸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을 둘러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분쟁을 조정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동원하여 교황청을 장식케 했다. 그의 꿈은 교황령 국가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추기경을 사임하고 공작이 된 아들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영어식 발음은 카이사르 보르자)가 이 꿈을 실현하는 데 앞장서주기를 기대했다. 

체사레는 1499년 말 교황령 내 독립했거나 다른 군주국에 의지하던 도시를 대상으로 원정길에 오른다. 당시 교회의 권위는 십자군 전쟁과 14세기 아비뇽 유수를 거치면서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자 여러 도시가 이탈하여 힘이 강력해진 세속 군주들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체사레는 루이의 군대와 함께 오늘날 에밀리아 로마냐 주에 속하는 지역 대부분을 정복 후 로마냐 공국을 세워 그들의 꿈을 실현하는 듯했다.

 

1502년 루이와 에스파냐 페르난도 2세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지면서 마찰이 생겼다. 최초 나폴리 분할 점령에 동의했던 에스파냐가 프랑스를 공격했다. 페르난도는 처음부터 영토를 분할할 의지가 없었다. 결국, 두 나라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에스파냐에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레콩키스타(Reconquista, 기독교인에 의한 재정복)를 완수한 명장 곤잘로 데 코르도바가 있었다. 그는 1503년 4월 체리뇰라 전투와 12월 나폴리 북쪽 가릴리아노강에서 프랑스군을 궤멸했다. 나폴리는 1714년까지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김종법·임동현,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그러자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체사레에게 넘긴다는 밀약 하에 프랑스군을 지원했던 교황은 난감한 처지에 몰렸다. 결국, 교황은 루이 12세를 멀리했다. 하지만 72세의 교황은 열병에 걸려 그해 8월 급사했다. 함께 말라리아에 걸렸던 젊은 체사레는 병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신을 받쳐준 권력 기반이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 군주 중 가장 반도의 통일에 근접했다고 꼽은 인물이다. 하지만 선친과 적대적이었던 율리우스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1504년 에스파냐로 추방당했다. 이후 처남 후안 3세가 통치하는 나바라 왕국 내 반란을 진압하던 중 1507년 서른한 살 이른 나이에 서둘러 다시 오지 못할 길로 향했다.


진정한 르네상스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담비를 안은 여인(1485~1489)>

<담비를 안은 여인>이다.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1482년 밀라노로 이주했을 때 완성한 작품이다. 모델은 그곳 총독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의 정부(情婦) 체칠리아 갈레라니이다. 매우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3/4만 정면을 향했다. 소위 ‘얼짱 각도’다. 투명한 피부, 긴 손가락 등 인체의 표현이 신비하면서도 몽환적인 효과를 냈다. 유명한 ‘스푸마토 기법’으로, 색과 색 사이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깊이와 오묘함을 더해 주는 음영법이다. 다 빈치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온다. 그의 주저주저하는 성격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기법이다. 여러 면에서 <모나리자>와 비교되며, 폴란드 크라쿠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가 안고 있는 담비는 루도비코를 상징한다. 레오나르도에게 <최후의 만찬>을 주문한 인물이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와 달리 레오나르도는 절정의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로마 바티칸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1482년 로렌초의 소개장을 들고 루도비코를 찾아갔고, 그가 실각하는 17년 동안 몸을 의탁했다. 그러나 1499년 10월 루도비코의 집권은 종말을 맞았다. 그해 12월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기 위해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향해 출발해야만 했다. 1, 2차 이탈리아 전쟁 때 벌어졌던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1502년에 당시 악명 높던 용병 사령관 체사레 보르자의 건축 및 군사 고문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1503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앙기아리의 전투>를 작업하던 중 밀라노 총독 샤를 당부아즈의 호의로 1506년부터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샤를 당부아즈마저 1511년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후원자 줄리오 데 메디치를 따라 1513년 9월 로마 교황청으로 향했다. 새 교황 레오 10세의 궁중 화가로 활동할 기회였다. 그러나 로마는 예순한 살 레오나르도를 위한 땅이 아니었다. 오만한 독일 수공업자들과 갈등이 심했고, 중대한 작업은 이미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있었다.

* 프랑크 죌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로 기술되어 있으나 바로잡는다. 그는 로렌초의 동생으로 이미 고인이 되었을 때다. 따라서 그의 사생아, 훗날의 클레멘스 7세를 가리킨다고 판단했다.


1516년 여름, 그는 제자 프란시스코 멜지와 함께 프랑스 중부 은빛 루아르강 계곡 둘레에 자리 잡은 앙부아즈에 도착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 1세가 마련해준 근처 클로 뤼세에 저택으로 3점의 그림을 가져왔다. ‘국왕의 제일 화가, 건축가 겸 엔지니어’로 위촉된 그는 남은 기력을 다해 그중 두 점을 완성했다. <성 안나>와 1911년 8월 21일 절도범 빈센초 페루지아가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 불렀던 <모나리자(1503~1506)>가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 피렌체에 있을 때 작업한 <모나리자>가 완성작이 아니거나, 주문자가 작품 인수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1503~1506)>과 라파엘로의 <유니콘을 안고 있는 여인(1505~1508)>

<모나리자>의 ‘모나’는 마돈나, 그러니 ‘리자 부인’이란 뜻이다. 당시 화가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정숙한 여인의 미와 덕을 반영했다. 작품 속 주인공 리자 델 조콘도의 미소가 유명하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던 부인이 사려 깊은 남편의 배려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향해 짓는 미소다. 그녀는 아들 안드레아를 낳기 수개월 전인 1503년 봄, 새 집을 샀고, 그 집을 장식하기 위해 초상화를 주문했다. (프랑크 죌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러나 당시 초상화로서는 획기적이다. 웃고 있는 설정 자체가 그렇고, 눈썹과 앞머리가 뽑힌 듯한 모습의 여성을 관람자 코 앞에 들이댔다. 그리고 전작과 달리 풍경이 배경을 이룬다. 자연을 대우주로,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 레오나르도의 철학이 반영되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괴기스러운 풍경이었다. 라파엘로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유니콘을 안고 있는 여인>과 비교해 보면, 어떤 의미인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주문자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구미보다 자신의 철학에 기초한 작품(다니엘 아라스, <서양미술사의 재발견>)이라는 데 동의한다.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왔다는 ‘인증 샷’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는 게 좋겠다. 


다 빈치가 예술을 사랑하는 프랑수아 1세와 만난 시기는 마리냐노 전투(지금의 이탈리아 멜레냐노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의 동맹 스위스군 간의 전투를 말한다)가 끝난 직후였다. 프랑수아가 제3차 이탈리아 전쟁(캉브레 동맹 전쟁)의 종전 협약 차 교황 레오 10세와 만난 자리에서 처음 대면했다. 프랑수아는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예순네 살의 레오나르도를 정중하게 프랑스로 초청했다. 그는 동갑내기 주군 루도비코를 잃고 8년을 방랑하던 차였다. 레오나르도는 초청에 응했고, 1519년에 생 플로랑탱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예순일곱 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


이렇게 레오나르도의 시신은 이국 땅 프랑스에 묻혔다. 그는 피렌체 근교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이 ‘빈치 마을의 레오’라는 뜻이다. 어머니 카타리아는 농사꾼의 딸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신분 차이로 인해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 레오나르도는 서자였다. 그 때문에 재주가 남달랐어도 당시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전혀 몰랐다. 라틴어와 수학은 서른 살 때 독학했기에 스물세 살 아래 미켈란젤로보다 철학적·신학적 기반이 취약했다. 이로 인해 다른 한 명의 ‘르네상스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에 비해 시야가 '현대적'이지만, 단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평생 미켈란젤로에게서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귀족 출신인 미켈란젤로가 플라톤이라면, 서자인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외롭고 불안정한 생활을 견디게 한 것은 그의 느긋한 성격과 게으름 덕이었을지 모른다. 설사 게으르다는 말에 항변할지 몰라도 그가 자연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그 배경을 이루는 어떤 성질과 관계를 밝히는데 지나치게 천착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만약 그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그가 남긴 작품은 15점의 회화와 한 점의 프레스코화가 전부지만, 무려 1만 3천 쪽에 달하는 노트가 그의 모든 번민을 대신 말해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