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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15. 2021

사보나롤라와 산드로 보티첼리

프라 베르톨로메오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초상(1497~98)>

피렌체에서는 사보나롤라를 주축으로 한 신권(神權) 정부가 구성되었다. 1491년 산마르코 수도원장이 된 그는 시민에겐 ‘참 신앙인으로의 복귀’, 교회엔 ‘부패에 대한 반성’,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실질적인 공화정을 주창한 인물이다. 공화국의 시의회는 ‘선대에서 고위 관직을 맡은 적이 있는 29세 이상 모든 시민’으로 구성했다. 의원 수는 1,000명으로 제한했고, 임기는 여섯 달마다 교체했다. 이곳 부수도원장이자 동료 수사인 프라(Fra, 프라테(frate, 형제)의 약어로 사제를 의미) 베르톨로메오가 피렌체의 개혁을 이끈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초상>을 그렸다. 조그만 목판(47ⅹ29cm) 위에 유채 기법으로 거대한 인물상을 담았다.

도미니크회의 엄격한 종교인 사보나롤라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그리스·로마의 이교도 신들로 인해 더럽혀졌고, 시민들은 인본주의의 미명 하에 향락과 퇴폐로 물들었다. 그 주범은 메디치가(家)였다. 시민들은 샤를 8세의 군대가 저지른 약탈을 사보나롤라가 예언했던 ‘신의 칼’, 즉 종말로 받아들였다. 1497년 2월 7일, 카니발 기간 중 사보나롤라는 시 정부가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 맞은편에 피라미드식 건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을 태우는 ‘허영심의 소각’을 명령했다. 불길이 치솟자 군중들은 나팔과 종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불렀다.

사보나롤라가 토해내는 사자후(獅子吼)에 지식인을 비롯한 시민들의 호응이 컸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베니비에니, 우골리노 베리노 같은 학자와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 필리피노 리피, 그리고 어린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그의 묵시록에 관한 설교에 귀 기울였다. 산드로 보티첼리(Botticelli, Sandro 1445?~1510)도 동료 로렌초 디 크레디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던져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교도 신화의 형식을 빌려 관능을 표현했던 보티첼리가 참 기독교인으로 돌아와 큰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과격했다. 그리고 샤를의 군대는 그가 예언한 ‘천사의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 교황이 부패했다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려는 노력에 힘을 보태지 않았다. ‘교황 중의 네로’라는 별명의 알렉산데르 6세(로데르고 보르자)는 그에게 먼저 설교금지령을, 그리고 이에 응하지 않자 1497년 6월 파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스카나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 프랑스는 약속을 어기고 피사를 피렌체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때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프란체스코 다 풀리아가 도미니코회를 향하여 ‘불의 심판’을 제안했다. 사보나롤라의 계시에 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양 교단을 대표하는 수사 한 명씩 불길을 통과하되, 불에 타 죽는 측의 교단을 추방하기로 합의했다. 사보나롤라가 믿었던 샤를 8세가 죽은 지 이틀 후인 1498년 4월 7일, 시뇨리아 광장에 길이 30m 불의 복도가 세워졌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 되자 양 교단은 모두 망설였고, 쏟아지는 비로 인해 심판은 중단되었다. 모든 비난이 사보나롤라로 향했다. 그간 그의 가짜 예언에 속았다고 느꼈다. 성난 군중과 시뇨리아(시의회)는 그를 탑에 감금했다. 결국, 두 제자와 함께 이단죄와 종파분립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시뇨리아 광장 ‘허영심의 소각’이 열렸던 같은 지점에서 5월 23일 공중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다. 그가 피렌체를 통치한 지 4년 만에 찾아온 참극이다. “오! 주여”’를 부르짖던 사보나롤라는 한 줌의 재로 변해 베키오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 버려졌다.


무명의 피렌체 화가가 그린 <사보나롤라의 처형>과 그림 세부


그의 사후에도 피렌체는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공화국 체제가 유지되었다. 대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종신 곤팔로니에레에게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발전했다. 1502년 피에로 디 톰마소 소데리니가 선출되었고, 마키아벨리가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다수표를 받은 소데리니는 어느 정파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선량한 인물이었다. 참고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1513)>을 통해 사보나롤라를 예로 들며 기독교 윤리와 좋은 통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규정했으며, 교회는 그의 저서를 200년간 금서로 정했다. (알랭 드 보통이 설립한 인생학교, <위대한 사상가>) 한편 <사보나롤라>의 초상화가 프라 베르톨로메오는 1500년 도미니코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보티첼리는 당시의 충격으로 15세기 말 다가오는 종말을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증언한 <신비의 강탄> 이외의 거의 모든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보티첼리의 <신비의 강탄 혹은 그리스도의 탄생(1500?)>

메디치가에서 도나텔로가 코시모 사람이라면,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사람이다. 보티첼리는 당시의 종교화 일색에서 벗어나 그리스 신화를 다룬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신화를 재해석했다. 사실 이는 기독교의 천지창조설에서 빗겨간 이교도적 도전이었다. 보티첼리보다 일곱 살 아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서른 살이나 어린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면, 보티첼리는 그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가 말년이 되자 붓을 놓고 깊은 시름에 빠졌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와 죽음 때문이었다. 그에게 감화를 받았던 보티첼리는 자신의 미술 양식을 다시 살펴보았다. 1504년경 <비르기니아와 루크레티아 이야기>라는 두 점의 패널화를 그렸다. 모두 지도자들의 폭정 때문에 발생한 로마 시민과 군인의 반란을 담은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진정한 공화국이 건설되기를 소망한 작품이다. 

1510년, 지난 세대의 유물 취급을 받던 그는 결국,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이 사랑의 봄에 태어났다면, 그의 죽음은 삭풍이 부는 겨울 어느 날로 보아야겠다. 그리고 샤를 8세 침입 때 베네치아와 볼로냐로 도망갔던 미켈란젤로는 1495년 봄 피렌체로 돌아와 사보나롤라가 죽기 몇 달 전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피에타>를 조각했고 1501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공화정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다비드(1501~1504)>를 조각했다. 이때 목도한 경험이 그의 영감을 자극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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