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피렌체의 ‘위대한 자’ 로렌체 사후 이탈리아반도에서는 도시국가 간 총 네 차례의 롬바르디아 전쟁이 벌어졌다. 지엽적인 전투였으며, 그나마 이후 국가 간 권력 균형이 이루어지면서 40년 동안 평화를 만끽했다. 같은 해 프랑스와 잉글랜드도 지난했던 백년 전쟁을 끝냈다. 유럽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을 축으로,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등이 열강을 이뤘다. 이들은 전력에서 이탈리아반도의 도시국가들과 큰 차이를 보였다.
1494년 8월, 프랑스 샤를 8세가 끓어오르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2만여 명의 군을 움직여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기사들의 전쟁은 이미 종말을 맞았을 때다. 상비군과 용병이 잘 어울렸다. 스위스 창병이 보병의 핵을 구성하고, 기병대는 자신감이 넘쳤으며, 청동 포병 연대는 공격 목표가 된 성을 폐허로 만들 수 있었다. 프랑스의 침입은 샤를 7세와 루이 11세 덕분에 유럽에서 제일 강대한 육군을 보유한 까닭도 있겠으나 용병의 관심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유럽 근대사’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는 이 전쟁을 ‘이탈리아 대(大) 전쟁(Great Wars of Italy)’이라고도 부른다. 언뜻 보아 ‘대전쟁’이라는 개념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러 나라가 개입했고,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반도임을 고려할 때 문화사적으로는 그리 불러도 무방하겠다.
전쟁은 네덜란드 독립전쟁 발발(1567) 직전까지 벌어졌다. 기간 중 소위 ‘종교개혁’으로 인해 라틴교회가 극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교황은 속세의 이해에 급급했다. 교황령을 둘러싼 전쟁과 베드로 성당 건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 진력하면서 프랑스는 물론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과도 갈등을 일으켰다. 전쟁 초기 교황령 국가를 포함하여 반도 내 거의 모든 국가가 휩쓸렸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스파냐) 그리고 잉글랜드 등 유럽 열강과 심지어 오스만 제국까지 참여하기에 이른다. 외형상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 문제로 야기된 전쟁이지만, 순식간에 이권을 둘러싼 국제전 형태로 변질됐다. 각국 군주들도 신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과 역 동맹에 가담했다. 로렌초 부재(不在)에 따른 파급효과로 분석하기도 한다.
샤를 8세는 목적지인 나폴리를 향해 프랑스 동남부 비엔을 출발했다.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가 죽자, 최초 왕국을 건설했던 앙주 가문이 왕위를 승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배후에는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별명 일 모로)의 꼬드김이 있었다. 조카 지안 갈레아초 스포르차가 성년이 되었음에도 통치권을 넘겨주지 않았던 그가 조카의 장인이 통치하는 나폴리 왕국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샤를을 충동질했다.
파죽지세였다. 밀라노 공작 지안 갈레아초가 사망했다. 삼촌 루도비코에 의한 독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베네치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문제는 원정 경로에 위치한 피렌체였다. 로렌체의 장남 피에트로 데 메디치는 갈팡질팡했다. 나폴리와 전통적인 동맹을 지키려 했다가 뒤늦게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발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진 못했다. 국경 요새 사르차나가 함락되자 피에트로가 20만 피오리노(1피오리노는 18금 3.56g)를 제공하는 등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에 의한 약탈과 살육이 저질러졌다.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추방된 피에트로와 메디치 가문을 대신해서 도메니코회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가 권력을 잡았다.
샤를 8세가 쳐들어오자 나폴리 왕 알폰소 2세는 시칠리아로 도망갔고, 프랑스군은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해방자가 아니라 원정군이었다. 약탈에 대한 원성이 커지면서 분열된 이탈리아 공국들이 뭉쳤고, 베네치아 동맹이 결성되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 막시밀리안), 에스파냐(아라곤 왕 페르디난도), 교황(알렉산데르 6세),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군을 끌어들인 밀라노의 루도비코까지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자 샤를의 군대는 본국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게다가 질병이 돌아 전력이 반 이상 줄어들었다. 결국,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철군을 결심했고, 천신만고 끝에 되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상비군의 막강한 위력을 확인하고 전리품을 챙긴 것 외 소득이 없었다. 샤를은 1498년 스물여덟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앙부아즈 성관 출입문 돌 모서리에 이마를 다쳐 급사했는데 종형인 오를레앙 가의 루이가 왕위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