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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20. 2021

'신이 준 화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 '세기의 대결'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세티냐노의 어느 석공 아내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자신은 조각가가 천직이라는 농담을 즐겨 했다. 열세 살에 피렌체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되었으나 곧 그림에 싫증을 느꼈다. 결국, 산 마르코 성당 정원의 조각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열다섯 살 미켈란젤로와 시인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메디치 가문 로렌초가 처음 만난 일화가 유명하다.

에밀리오 조키(Emilio Zocchi, 1835~1913)가 사티로스의 머리를 조각하는 <소년 미켈란젤로(1862)>를 상상했다

어느 날 어린 미켈란젤로가 손에 처음 끌을 쥐고 대리석에 사티로스(로마의 파우누스) 상(像)을 조각하고 있었다. 사티로스는 납작코에 히죽거리는 입을 한 늙은 목축의 신으로,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이 더해진 훌륭한 작품이었다. 이를 본 로렌초가 한마디 거들었다. 


“얘야, 노인의 이는 대개 몇 개는 빠지는 법이지.” 


농담처럼 한 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정원을 찾은 그는 깜짝 놀랐다. 미켈란젤로가 어느새 이빨 한 개를 빼서 완벽한 노인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로렌초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미켈란젤로 아버지 루도비코에게 연락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매달 5두카트(Ducat)를 받으면서 메디치궁전에서 생활했다. 그는 로렌초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지냈는데, 그들 중엔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도 있었다.





베키오 궁전 입구 <다비드상(1501~1504)>의 모습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도나텔로의 제자 베르톨도 디 조반니에게서 수련을 받았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조각에서 받은 영향으로 완벽한 육체를 구현했다. 인체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의 작품 중 으뜸은 역시 <다비드상>이다. 강국 블레셋의 힘센 장사이자 백전노장인 골리앗을 맨손으로 상대한 다윗이 바로 다비드이다. 승산이 없었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다비드는 정치적으로는 피렌체 공화제의 미덕을 상징한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얼핏 보면, 단순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크 시대 베르니니의 역동적인 1623년 작품과 비교해 보면,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콘트라포스트' 자세의 다비드에서는 인체의 모든 근육과 혈관에서 미세한 떨림이 발견된다. 수직으로 떨어진 다비드의 오른팔과 고정된 오른쪽 다리, 그리고 꺾인 왼팔과 움직이는 왼편 다리가 대조를 이루면서 싸우기 직전의 긴장감이 온몸에 흐르고 있다. 다 빈치처럼 인체 해부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가 신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다. 신이 진흙에서 생명체를 창조했듯이 조각가는 돌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는 믿음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숨어 있는 434cm의 <다비드>를 대리석 덩어리에서 “꺼내 왔다”고 표현한다. 피렌체의 철학가이자 역사학자인 베네데토 바르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켈란젤로는 "나는 조각이란 떼어내면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작품에 사용한 대리석은 유명한 카라라 채석장에서 가져와 오페라 델 두오모(성당) 창고에 묵혀 있었다. 1464년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이 대리석으로 조각하도록 계약을 맺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취소했다. 1475년 안토니오 로셀리노에게 제작 책임이 넘어갔지만, 초벌 손질만 했을 뿐 작품을 끝내지 못했다. 미켈란젤로로서도 두께가 너비와 높이에 전혀 맞지 않아 쓸모없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계를 '신체는 정면으로, 얼굴은 측면으로' 조각함으로써 극복했다. 

그는 키 155cm의 왜소한 체구였음에도 단단한 대리석을 15분 만에 깎아낸 양이 젊은 석공 세 사람이 서너 배 시간을 들인 것보다 많았다. 돌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탁월했다. 그런데도 2년 안에 끝낼 것을 약속했지만, 4년이나 걸렸다. 작품은 최초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버팀벽 중 하나로 놓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다비드>가 너무 거대해서 부적당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비드상을 어디에 세울지를 협의하기 위해 예술가위원회가 소집되었다. 보티첼리도 위원회에 참석했으며, 결정권을 미켈란젤로에게 부여했다. (이와 상반된 주장이 공존한다) 작품의 상징성을 고려, 가장 잘 눈에 띄는 장소인 베키오 궁전 입구로 결정했다. 따라서 원래 그곳을 지켰던 도나텔로의 청동상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456~1460)>이 즉시 로지아 회랑으로 옮겨졌다. 이탈리아가 완전한 통일을 이룬 직후 1873년에 작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고, 지금 시뇨리아 광장 원래의 위치에는 모조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실망은 접어두시라. 자고로 조각은 최초 설치된 주변 공간과 함께 감상해야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모사품이지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비드>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수장은 피에르 소데리니였다. 사보나롤라 사후 새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다비드의 코가 조금 크게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경솔함이다. 비계(飛階)에 올라간 미켈란젤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준비한 대리석 가루를 끌로 파내고 있는 것처럼 아래로 흘려 떨어뜨렸다. 그러자 소데르니가 만족해하며 한마디 했다.


"이제야 조각에 생생한 삶을 불어넣었소." 


소데르니의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야겠다. 그는 후손들의 궁금증을 덜어주려는 듯 세기의 대결,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드로 다 빈치를 회화에서 격돌케 했다. 나중에 베키오로 개명하는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 궁 의사당 대회의실을 장식할 벽화였다. 1503년, 쉰두 살 레오나르도가 <앙기아리 전투>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소데리니 시정 장관이 1504년 8월, 미켈란젤로에게 맞은편 담벼락 프레스코화를 위촉했다. 참고로 지금 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유채 스케치>는 진본이 아니다. 17세기 초반 미상 화가의 모사본을 루벤스가 테두리 부분과 네 번째 기사를 가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 유채 스케치>

말을 탄 장수들이 엉켜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왼쪽은 밀라노군 지휘관 프란체스코 피치니노와 그의 아버지 니콜로이다. 오른쪽에는 교황과 피렌체 동맹군의 두 인물 피에르잠파올로 오르시니와 루도비코 스카람포가 대적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증오가 가득하다. 특히 왼편 피치니노의 심하게 비틀린 상반신과 일그러진 표정에는 격노가 드러난다. 막다른 곳에 몰린 장수의 거친 숨을 내뿜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피렌체 동맹군의 장수는 오히려 냉철하다. 밀라노 측이 격정의 마르스라면, 피렌체 측은 이성의 미네르바라고 할 수 있겠다. 앞발이 엉킨 두 마리 말도 덩달아 이빨을 드러내며 분노를 표출다. 말의 근육과 운동의 미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당대 일인자인 레오나르도의 자신감이 잘 나타나 있다.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3>) 

미켈란젤로 <카시나 전투> 밑그림 모작

이번에는 아리스토틸레 다 산 갈로가 다시 그린 미켈란젤로의 밑그림 모작이다. 정중앙 뒤틀린 인체에서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의 형태적 특징이 엿보인다. 관리 소홀로 여러 갈래 찢겨서 각처로 흩어졌던 작품을 1542년 바사리 부탁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그림의 주제는 앙기아리 전투보다 65년 앞서 일어난 <카시나 전투>이다. 피사와 벌인 전투로, 피렌체가 승리했다. 피렌체 백성의 애국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기획했다. 그런데 병사들의 모습이 특이하다. 모두 벌거벗었다. 조각가로서의 장점을 살리려 했음이 분명하다.

 

무더운 여름날, 아르노강에서 병사들이 목욕할 때 갑자기 적군이 나타났다. 나팔수가 비상을 알렸다. 그 황급한 순간, 병사들의 당황과 초조함에서 비롯된 다양한 행동과 표정이 잘 드러났다. 특히 전경 오른쪽에 앉아 젖은 다리를 최대한 빨리 바지에 끼워 넣으려는 늙은 병사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낸다. (같은 책 5권 참조) 남성 누드의 풍부한 묘사에 집중했다. 이 그림은 근육질 남성 누드를 심하게 비난했던 레오나르도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미켈란젤로가 대선배에게 자극을 준 것이다. 여하튼 이때 보여준 누드 묘사는 미켈란젤로의 회화에서 전매특허가 되었고, 훗날 <최후의 심판>에서 관음성을 둘러싸고 교회와 큰 갈등을 빚게 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두 사람은 피렌체에서 만났다. 레오나르도가 스물세 살 연상이다. 나이도 그렇지만, 성격이 너그러웠던 레오나르도에게 미켈란젤로는 필요 이상으로 쌀쌀맞게 대했다. 열정과 신앙심이 부족한 사람을 미워하는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레오나르도의 실력이 그를 긴장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다. 둘은 서로의 실력을 얕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상당한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유독 이런 태도로 대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여덟 살 아래인 라파엘로이다. 야망을 갖고 피렌체로 온 당시 라파엘로는 두 거장의 회화에서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 

두 천재의 간접 비교 자료가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하지만 실제 대결은 끝을 보지 못했다. 먼저 시작했던 레오나르도는 전투 장면의 중앙 부분만 완성했다. 그는 주문자가 보수에 인색한 태도를 보여 언짢았던 차제, 프랑스 파견 밀라노 총독 샤를 당부아즈가 청원을 냈다. 그러자 피렌체 정부는 1506년 3개월간 휴가를 주면서 그를 밀라노로 보냈다. 그리고 템페라 기법을 사용한 작품에서 물감이 흘러내렸다. <최후의 만찬> 두 배 크기의 이 작품이 완성되었더라면, 그의 최대 대작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이에 앞선 1505년 3월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그리고 라파엘로와 함께 로마 르네상스 미술의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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