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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25. 2021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라파엘로

<마리아의 결혼(150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서른한 살이 많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죽고 1년 만에, 여덟 살 많은 미켈란젤로보다는 44년이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천국에서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서둘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제자인 그가 페루자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 <마리아의 결혼(1504)>이다. 사실 마리아는 성서에서 역할이 작고, 또 적다. 그러나 훗날 신학자들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리아 숭배’로 이어졌고, 유럽의 정서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라파엘로도 성모 마리아의 모티브는 그의 짧은 생애 내내 동행했으며, 그래서 그를 찾는 고객이 많았다.


작품은 프란체스코 교회인 치타 디 카스텔로 교회 알비치 소성당 제단화로 제작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식 장면이다. 성경이 아니라 <야고보의 원복음서>에 나오는 일화를 담았다. 마리아와 결혼을 원하는 구혼자가 넘쳐났다. 열두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대사제가 나서 구혼자 각자에게 지팡이를 가져오게 했다. 신전 앞에 모인 그들이 가져온 마른 지팡이 중 요셉의 것에서만 싹(혹은 꽃)이 피었다. 이래서 대사제가 요셉을 간택하여 마리아와 혼인한다는 내용이다.

 

라파엘로가 선택한 마리아의 옷은 전통의 빨간색과 파란색 색조 그대로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경쟁에서 탈락한 구혼자가 격렬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지팡이를 발에 대고 부러뜨리며 분을 푸는 모습이 담겼다. 웃음을 유발하는 이 장면은 그가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1513~14)>에 나오는 ‘케루빔(cherubim) 천사’와 닮은 일종의 재치이자, 유머이다. 그림은 중앙 원근법을 사용하여 일화(과거)와 성당(현재)을 조화롭게 담았다.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의 기하학적 이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적인 해석일 수 있지만, 라파엘로는 훗날 은혜를 입게 되는 인물의 업적을 자신의 작품 안에 미리 담아 보답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림 세부, 템피에토

그림은 가운데를 기준으로 상하로 나누어졌다. 소실점이 중앙 출입구로 모이는 예루살렘 신전의 모델이 브라만테의 <템피에토(1502)>이다. 로마의 산 피에트로 몬토리오 성당 내 베드로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지은 소성당이다. 아래층 제단과 반구형 천장을 덮은 2층 원형 로톤다(서양 건축에서 원형, 또는 타원형 면으로 구성된 건물이나 방)이다. 고대 로마의 유산을 완벽하게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후한 느낌을 부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부터 신전은 이를 확장하면, 될 일이었다. 당대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양식이다.

사실 그림은 스승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성모의 결혼(1502~1504)>을 자기 스타일로 패러디했다. 그러나 좀 더 생생하고, 드라마틱하다. 작품이 완성된 그해 라파엘로는 우르비노에서 피렌체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다 빈치 공방에서 그림 공부를 해보지만, 미켈란젤로가 지배하는 피렌체 미술계에는 발붙이기 어려웠다. 1508년 다시 로마로 떠난다. 이때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자신을 추천해 준 인물이 바로 같은 우르비노 출신 건축가 브라만테이다. 덕분에 라파엘로는 로마로 와서 회화의 꽃을 피웠다. 마치 그림 속 요셉의 마른 지팡이처럼.


라파엘로 산치오가 피렌체에서 미술 유학을 마치고 로마로 온 때는 1508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는 단번에 로마의 스타로 떠올랐다. 회화 하나를 놓고 보면, 결코 미켈란젤로보다 떨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 반듯한 예의범절로 모두가 좋아했다. 드디어 교황청 궁정화가가 되어 교황이 거주할 네 방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할 책임을 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교황의 개인 서재로 쓰던 서명실의 <아테네 학당>이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지적 세계로, 교황의 방을 이교도 철학자로 가득 채웠다. 당시 교회의 자신감도 높이 살 만하다. 맞은편 신학적 토론을 담은 <성체 논의(1509~1510)>를 같은 크기(500x770cm)로 그려 두 작품이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테네 학당(1510~1512)>

아폴론 상과 아테네 신상이 좌우로 장식된 웅장한 건물의 궁륭 안에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였다. 라파엘로는 당시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소실점이 모이는 중앙에 배치했다. 옆구리에 ‘티마이오스(우주의 기원을 설명)’를 끼고 있는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들고 땅을 가리킨다. 신화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합리적인 철학의 시대를 열었던 그들은 사제 간이지만, 매우 대조적인 학풍을 지녔다. 대스승 소크라테스를 왼편으로 치우치게 배치하고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라파엘로가 서로 다른 몸짓으로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학문 세계를 잘 요약했다. 반 벌거숭이 모습으로 계단에 기대어 앉은 디오게네스, 사람에 둘러싸여 공식을 적고 있는 피타고라스, 허리를 굽혀 컴퍼스를 돌리는 유클리드(브라만테 초상), 천구(天球)를 든 프톨레마이오스…. 그야말로 54명이 벌인 화려한 지식의 향연이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들을 특성에 맞추어 위치시키고 이미지화했다. 고대 그리스 인문정신과 중세 신학을 종합적으로 아우르면서 그 철학적 박식함에 있어서 미켈란젤로를 극복했다는 평가다.


흰 수염을 보고 많은 이들이 플라톤은 다 빈치가 모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업을 할 때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를 못 본 지 적어도 십 년은 되었다. 또한 이런 가정이라면, 상대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이 누구냐가 중요해진다. 다니엘 아라스는 <서양미술사의 재발견>에서 신플라톤주의자인 라파엘로의 심오한 뜻이 이 지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라파엘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드로잉을 참고로 플라톤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 말인즉은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흡수하여 작품의 주제인 '철학' 전체를 통합한 인물임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발아래는 비교되는 인물 디오게네스를 배치했으나, 플라톤 앞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라파엘로가 다 빈치에게 감사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사실이다. 1504년 스물한 살 나이로 그가 피렌체에 처음 왔을 때 살갑게 대해준 인물이 바로 다 빈치였다. 무뚝뚝한 미켈란젤로의 안중에는 약관의 라파엘로가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천재성은 타인의 장점을 빠르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습득력이다. 그는 피렌체 생활을 통해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습득했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 빈치와는 달리 집념이 강했고, 회화 하나에 집중했다. 고전이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고대 그리스 철학에 담겨 있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문제는 기법 이상의 차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를 늘 부러워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아테네 학당>을 착수했다. 


작업 마지막으로 플라톤 아래 멀찍이 떨어진 곳에 헤라클레이토스를 배치했다. 명상가인 그는 전경 중앙에 팔꿈치를 탁자 위에 기댄 채 사색에 잠겨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의 얼굴에 미켈란젤로의 초상을 넣었다. 작업 도중에 미켈란젤로가 진행 중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본 후 경쟁심은 경외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났지만, 뒤늦게라도 헤라클레이토스에 초상을 입혀 자신의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다. 따라서 다 빈치가 플라톤이라면, 미켈란젤로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어야 했다는 호사가의 다툼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라파엘로 자신은 작품 속 서명처럼 오른쪽 끝에서 갈색 모자를 쓰고 하얀 망토를 두르고 서서 향연을 지켜보는 관람자일 뿐이다. 한편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없는 사이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에게 천장화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다는 뒷얘기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라파엘로의 천재성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잠시 작품 속 인물에서 벗어나 건물 공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실내 공간을 장식한 작품임에도 배경의 바닥 대리석과 아치 통로를 밝게 처리했다. 배경 건물이 하늘을 향해 개방되었다는 전제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브라만테의 건축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라파엘로는 브라만테 사후 성베드로성당의 건축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1547년 새해 첫날 70대의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새로운 건축 감독이 되었을 때 그는 설계도 원안과 수정안들을 모두 다시 검토했다. 그 중엔 라파엘로의 수정안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40년 전 브라만테가 최초 설계한 원안(1506년)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같은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수용한 중앙 건축이었다. 하지만 17세기 초에 이르러 동쪽 날개가 확장되면서 장방형 건축으로 모습을 바뀐다. 이 과정은 브라만테나 미켈란젤로의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위대한 예술가는 적어도 작품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라파엘로의 작품은 정숙함과 관능미를 함께 보여주는 <라 포르나리나(1518~1519)>이다. ‘제빵사의 딸’이란 뜻이며, 라파엘로의 연인으로 알려진 시에나 출신 마르게리타 루티를 가리킨다. 

성모자를 비롯해 그의 그림 대부분은 종교화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에게서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그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일반 여성을, 게다가 벗은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파격이다. 

누드 초상화는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훗날 그녀에게서 유방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채색했다. 또한 그림은 그의 작업실 이젤에 놓여 있었지만, 항상 천으로 가려 관리했다. 작가와 모델, 둘만의 비밀이기에 그만큼 소중히 대했으리라. 왼편 팔뚝 위 팔찌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고 새겼다.


11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지만, 궁정화가이며 지성인이었던 부친 조반니 산티의 재능을 잇고 가르침을 받았다. 변방의 우르비노 청년이 피렌체에서 겉돌다가 로마로 와서 성공할 수 있었던 동력에는 실력과 잘생긴 외모 못지않은 친화력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과 주변 사람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도 그가 제자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질시를 느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시대의 아픔과 무관한 공간에서 살았다. 사후 발생한 ‘로마 대약탈’을 피해 율리우스 2세로부터 레오 10세까지 교황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활동했다.


그는 회화에 관한 열정만큼 여인과의 사랑에도 힘을 쏟았다. 전기작가 바사리는 라파엘로가 ‘과도한 사랑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했다. 서른일곱 살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뮤즈였던 작품 속 여인은 넉 달 후 트란스테베레 산타 아폴로니아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며 간절히 자비를 구했다고 한다. 만인의 연인을 독차지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그랬을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랑이 죄였을까? 각설하고, 1520년 판테온에 묻힐 때 친구가 남긴 추모사를 보자. 그를 향한 남아 있는 자들의 그리움이 가득하다.


 “생전에, 그에게 정복될까 봐 자연마저도 두려워 떨게 한 라파엘로의 무덤이 여기 있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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