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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29. 2021

미켈란젤로의 말년과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삶은 위대했으나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선 레오나르도나 라파엘로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우수와 치열함이 존재한다. 그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기보다는 금전적으로 시달렸다. 역대 교황들은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빛내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예술가에 대한 존중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2세는 물론, 친구 레오 10세도 설탕처럼 단 소리를 하는 라파엘로를 끼고돌았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으로 공화정 체제에 경사되어 있었다.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처지에서 그는 이 부분에 관한 내적 갈등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실했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보나롤라의 죽음과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지켜보았다. 카를 5세의 용병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한 후 수그러드는 르네상스의 불씨를 지켜보았다. 어찌 예술가로서 온전히 사는 것이 이토록 피곤하냐고 느꼈을 법하다. 


최후의 심판(1534~1541)>

이때 반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바오로 3세의 주문에 의해 클레멘스 7세 때 중단되었던 과제가 다시 추진되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완성한 지 22년이 흐른 후로, 제단 뒤쪽 <요나>와 연결된 성찬대 벽의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 작업이다. 미술 양식으로서는 마니에리스모가 저물고, 바로크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을 때였다. 내면이 여렸던 그는 교황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작품으로 여기고 명을 받들었다. 쉰아홉 살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7년간 391명의 인물을 담았다. 중심부에 태양을 배경으로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가 없이 홀로 손을 높이 들고 심판하는 모습을 가장 밝게 그렸다. 마치 태양신 아폴로처럼 보인다.

그림 속 인물들을 모두 벌거벗겼지만,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서 찬미했던 영웅적인 누드가 아니다. 건장한 듯 보여도 모두 심판에 겁먹은 껍데기들이다. 저주받은 자와 구원받은 자를 굳이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림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마치 더 큰 그림의 일부처럼 보인다. 무한의 공간을 암시한다. 그는 비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기도 하고, 시력도 점점 나빠졌다. 노인의 강도 높은 육체적 작업은 그 공력으로 인한 위대함에 있어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완성작을 본 바오로 3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주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  


잘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은 ‘호색(好色)’ 시비에 시달렸다. 아담과 이브 이후 기독교에서 나체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옷은 살아 있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단순히 몸을 가리는 것에서 발전하여 인간의 지위와 계급을 반영하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미켈란젤로가 생각하는 육체는 ‘신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니 심판을 받는 자리에서 누드는 영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 의전 담당관 체세나 추기경은 “욕실이나 술 파는 곳이라면 모를까, 교황의 경당 같은 신성한 장소에 그려져 있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혹평했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견뎌내고 말년을 맞은 그가 명성을 탐내 사회적 센세이션을 노렸을 리가 없다. 그 방증이 자신의 모습을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죄인의 벗겨진 가죽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는 당시 종교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심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드와 관련하여 다툴 에너지가 바닥나고 없었다. 단테의 지옥편에 나오는 지옥의 심판자 미노스로 분장한 체세나 추기경의 몸을 뱀이 칭칭 감아 성기를 물고 있는 상징성으로 충분했다. 바오로 6세가 벽화를 부수려 했을 때도, 다니엘로 다 볼테라가 벽화에 반바지를 입혔을 때도 대응을 피했다. 다만 그의 의견을 묻는 이에게 연민과 비웃음으로 이렇게 한마디 했다.


“교황에게 말씀하시오. 제발 조그만 일에 마음 쓰지 말고 세상을 고치는 일에나 신경 써주기를 바란다고. 그림 따위를 고치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1564년 트리엔트공의회의 칙령에 의해 결국, ‘비속한 부분’에 덧칠이 이뤄졌다. 그리고 20세기 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와서 이 작품을 본래 상태로 복원할 것을 허락했다. 


말년의 론다니니 피에타(1564)와 최초의 피에타(1499)

<최후의 심판> 작업이 끝나고 1547년 건축 장관에 임명된 미켈란젤로는 무보수로 일했다. 선의의 경쟁자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가 떠난 뒤의 일이며, 늙은 몸뚱이 어느 곳에도 물질적인 욕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신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면서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완성했고, 도시 계획에도 관여했다. 말년에 그는 마지막 피에타 <론다니니 피에타>를 제작했다. 1564년 죽기 전날까지 열중했던 미완성 유작이다. 이 작품에는 <최후의 심판>을 작업하면서 느꼈던 말년의 회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명에 가깝던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번째 <피에타>는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것으로, 그의 나이 스물세에 제작했다. 이탈리아어 ‘피에타’(Pieta)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앉고 비탄에 잠겨 있는 '고통의 신비'를 묘사한다. 세간에는 지나치게 젊은 마리아의 얼굴, 예수보다 상대적으로 큰 신체, 사후 강직이 없이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예수의 시신 등 부정적인 면이 화제가 되었다. 그의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정숙한 여인이 더 오래 젊음을 유지한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한다. 마리아의 순결함을 젊음으로 표현했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근육과 핏줄 등에서 해부학적으로 주검이 잘 표현되었으며, 마리아의 옷 주름은 이미 다 빈치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경지이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주문받은 첫 번째이자 르네상스의 대표 조각품으로, 그의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밀라노의 곱사등이’ 크리스토포로 솔라리의 작품이라고 오해하자 밤에 촛불과 끌을 가지고 몰래 들어가 성모의 가슴에 두른 띠 위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젊은이에게 허용되는 일종의 치졸함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성모와 예수가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두 점 더 있다. <부루게스의 마돈나(1501)>에는 마리아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에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작가의 잠재의식이 배어 있다. 그리고 <산 로렌초의 마돈나(1521~1534))에는 최초의 회화 작품 <도니 톤도>와 같은 형태의 마니에리스모 양식이 숨어 있다. 

그러나 사후 발견된 <론다니니 피에타>는 이전의 작품들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수직으로 선 자세이며, 예수가 매우 수척해졌다. 숭고함보다는 고통과 절망이 발견된다.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이다. 따라서 여든아홉 살 독실한 신앙인 미켈란젤로가 긴 여정을 앞두고 어떤 감정으로 마지막 작품에 임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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