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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04. 2021

티치아노, 베네치아 화풍을 완성하다

자유로운 영혼 베로네세

<성모승천(1516~1518)>

티치아노 베첼리오(Vecellio Tiziano, 1488?~1576)의 초기 대표작 <성모승천(아순타, 1516~1518)>이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주문한 이 작품은 역시 ‘마리아 승천’이 주제인 <페사로 마돈나(1519~1526)>와 함께 베네치아 프라리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3cm 두께의 나무판 스물한 개를 붙여 만든 7m 가까운 높이의 대형 패널화로, 점층적인 구도를 선택했다. 성당의 중앙 제단에 걸려 있는데 100m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베네치아에서도, 티치아노 작품 중에서도 제일 크다. 피렌체의 프레스코화 미술과 대비되는 화려한 색채 중심의 유화 작품이다. 그는 얀 반 에이크가 발명한 유화를 캔버스에 사용하는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작품은 자칫 하나님-성모-사도, 셋으로 잘린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으나 성모를 잡으려는 사도의 뻗은 팔과 천사의 다리가 하나로 연결해준다. 아래 붉은색 의상을 입은 두 사도와 승천하는 마리아가 삼각 구도를 이뤄 역동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모든 시선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다. 1557년 작가 로도비코 돌체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이 있고, 라파엘로의 즐거움과 우아함이 있으며, 자연의 진정한 색채가 있다"고 평했다. 완벽하다는 의미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소묘에 약하다고 비판했지만, 자존심에서 한 말로 여겨진다. 1500년 이전 베네치아 화가들도 기본적으로 데생을 배웠다. 그러나 아드리아해에 접한 습한 기후로 발달한 유화(油畵)로 인해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간단히 스케치한 후 얼마든지 물감으로 덧칠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피렌체의 미켈란젤로가 ‘선(線)’이라면, 베네치아의 티치아노는 ‘색(色)’이다. 운하와 호수에서 반사되는 빛으로 인한 변화무쌍한 색채를 담아내는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중 티치아노는 붉은색을 흑백 다음으로 중시했다. 

 

누가 뭐라 해도 라파엘로 사후 회화의 최고봉은 티치아노였다. 1520년부터 그는 유럽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다. 빛의 삼원색, 즉 빨강, 파랑, 초록을 주로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그린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게 예사였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던 티치아노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당시 최고 권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에스파냐의 군주로서는 카를로스 1세가 된다)가 얼른 달려들어 주워 줬다. 당시로선 황망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때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티치아노가 아닌가.”


16세기 당시 속세 유럽을 지배했던 군주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이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와 나폴레옹 사이 약 1,000년의 기간 중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을 때 할아버지 막스밀리안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를, 할머니 부르고뉴의 마리에게는 플랑드르를, 에스파냐의 외할아버지 페르디난도와 외할머니 이사벨라로부터 에스파냐와 나폴리를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다 보니 딸린 직함도 영지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다. 인접한 강국 프랑스가 긴장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을 둘러싸고 프랑수아 1세와 갈등이 발생하여 두 나라간 질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의 초상(1532~1533)과 카를 5세의 기마 초상(1548)

티치아노는 1533년 공식적으로 궁정의 일원이 되면서 ‘황금 박차의 기사’와 ‘라테라노 궁의 백작’이라는 두 개의 직함을 부여받았다. '로마 대약탈' 이후 르네상스 문화는 베네치아로 자리를 옮겼을 때이다. 궁정화가 중에도 그만이 황체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작품이 <개와 함께 있는 카를 5세의 초상>이다. 티치아노의 첫 전신 초상화로, 카를 5세 초상화 중 현존하는 첫 번째 작품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종교개혁가에게 카를 5세는 이교도인 이슬람 술탄보다도 두려운 존재였다. 1547년 4월 24일, 그는 뮐베르크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군을 격파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티치아노는 고대 기마상, 특히 로마 카피톨리아 언덕 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을 기본 구성으로 한 대형 초상화를 그렸다. <카를 5세의 기마 초상>이다. 이 작품은 붉은색이 전반을 지배하고, 갑옷에서 반사된 빛의 연구가 깊다. 티치아노는 황제의 모습을 인간미 넘치는 그리스도교인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실제 심한 통풍으로 가마에 실려 전쟁터를 옮겨 다녔던 카를을 친근하면서 영웅적인 이미지로 재창조했다. 황제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자유로운 영혼 베로네세


<가나의 혼인잔치(1563)>

반도의 강국 베네치아의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잘 보여주는 화가가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이다. 산 조르조 마조레 수도원 식당에 걸 <가나(Cana)의 혼인 잔치>를 캔버스에 유채화로 그렸다. <요한복음>에 묘사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을 이야기 형식으로 엮었는데, 세속적이고 호사스러운 야외 예식 장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극 무대와 같은 화폭에 등장하는 인원은 모두 133명. 잔치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마침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때 예수께서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어라”고 말씀하셨고,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바뀌었다는 내용이다. 베네치아에서 유명한 ‘크리스털로’ 유리잔과 함께 페르시아 수입 실크와 자체 직물 기술이 결합한 ‘칸잔테 실크’가 마치 PPL(product placement advertisement) 효과를 나타낸다.

작품 세부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시 베네치아의 쟁쟁한 3대 화가가 등장한다. 그 정점에 티치아노가 있다.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틴토레토이다. ‘어린 염색공’ 틴토레토는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 양식을 도입했고, 극적인 연출과 빛을 이용한 강한 명암 대비로 후일 바로크의 싹을 틔워냈다. 긴장감을 느낀 티치아노는 그를 자극하려고 베로나 출신 베로네세를 베네치아로 불러들여 후원했다. 베로네세는 티치아노의 기대를 작품 속에 잘 반영했다. 

전경 중앙에 총 4명의 연주가가 발견된다. 전면 오른편에 티치아노가 큼지막한 비올레네를 연주하고, 왼편에는 흰옷을 입고 비올라 다 감바를 켜는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바이올린을 켜는 틴토레토는 코넷의 야코보 바사노와 함께 테이블 뒤편에 배치했다. 대가들의 유치한 힘겨루기가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나 가로 약 10m, 세로 약 7m의 이 대형 작품은 지금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178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침입했을 때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


145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지중해 동부를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베네치아가 위축되었다. 그러나 카토-캉브레시스 조약 체결 이후에도 반도에서 에스파냐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국가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일했다. (김종법/임동현, <이탈리아 역사>) 미술에서는 거꾸로 오스만 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가 <술탄 메흐메트 2세(1480)>의 초상화를 그리며 동서를 연결했다. 그리고 이슬람 전통 세밀화를 그리던 제국의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잘 드러난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미술이 그곳 화가들의 영혼을 흔들어 결국, 살인에 이른다는 설정이다. 여하튼 무역업을 하는 당시 베네치아인들은 생각이 자유로웠으며, 종교에서도 그랬다. “성경은 믿지만, 교황은 따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교도이기에 앞서 베네치아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레비가의 잔치(1573)>

베로네세는 또다시 대형 잔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레비가의 잔치>, 원래 작품명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성서의 에피소드와는 관련이 없는 궁정 생활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사건들을 대입했다. 그러다 보니 불경스럽게 종교화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동물이나 아랫것들이 포함되었다. 난쟁이가 앵무새를 안고 있으며, 흑인 소년이 심부름꾼으로 나온다. 그리고 구경꾼, 어릿광대, 개, 원숭이 등등. 반(反) 종교개혁 초기로, 교회를 위해 일하는 예술가에게도 엄격한 태도를 요구했을 때였다. 종교재판소에서 베로네세를 이단 혐의로 소환하여 50명이 넘는 인물을 넣은 이유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화가들은 시인과 미치광이들이 가진 것과 동일한 허기증(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아마 그는 예수의 처형과 부활이라는 사흘간의 무거운 주제를 벗어나 대부분의 삶을 제자와 이웃과 보낸 즐거운 시간에 주목했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그는 이단의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그러면서 그림 내용을 지우는 대신, 제목을 바꾸었다. 베네치아였기에 가능했다. 이후 그는 풍요롭던 상상력을 스스로 절제하였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최후의 만찬>을 다른 각도에서 완성했다. 


<최후의 만찬(1585)>

예수께서 계단을 내려와 대중과 눈높이를 같이 하며 식사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어쩐지 조금 위태롭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2년 후 그는 열병으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후 1605년 교황에 오른 파울루스 5세가 성직자의 면책 특권을 요구하자 거부했고, 나아가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 소유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1606년에는 기소된 2명의 가톨릭 성직자를 세속재판소에 회부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예수가 입장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는 이 선택적 질문의 답을 거절하며 말씀하셨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이 명제가 참이라면, 그 역도 참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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