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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06. 2021

이탈리아 전쟁, 그 대단원의 종말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

안드레아 만테냐의 단축법


<죽은 그리스도(1500?)>

마지막으로 베네치아 출신이지만, 파도바에서 활동한 초기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ea Mantegna, 1431?~1506)를 소개해야겠다. 그의 말년작이자 파격적인 걸작 <죽은 그리스도>가 유명하다. 그의 몇 안 되는 캔버스 작품이다. 완성 시기가 조금 혼란스럽지만, 스테파노 추피는 만테냐가 자신의 장례예배실(1506년 사망)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차가운 대리석 위 예수의 시신이 짧아 보인다.  누워 있는 시신을 약간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단축법 그림이다. 원근법이 화면 전체에 적용하는 작도법이라면, 단축법은 한 대상에 적용하는 원근법인 셈이다. 예수의 머리끝을 소실점으로 하여 피라미드 구도로 그렸다. 이 단축법은 파올로 우첼로나 엘 그레코에서도 발견되지만, 혁신성과 대담성에서는 단연 만테냐의 시도가 돋보인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매 맞고 피 흘리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에 이르러서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스 홀바인의 유명한 작품 <무덤 속 예수의 시신>을 연상시킨다.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정면에서 바라보았기에 그렇다. 기법 면에서 옆 모습보다 단축이 까다롭다. 자칫 유치해 보이기 쉽다. 게다가 예수의 주검이다. 함부로 도전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테냐의 작품은 전혀 무리가 없다. 못이 박혔던 발바닥과 손등,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을 가슴의 뼈를 클로즈업함으로써 오히려 예수가 겪었을 고통이 실감 난다. 마치 보는 이에게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이만하더냐?”라고 묻는 듯하다.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마리아나 두 손을 꼭 잡은 사도 요한의 슬픔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한스 홀바인, <무덤 속 예수의 시신(1521)>

만테냐는 작업 속도가 늦어 주문자들의 불만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꼼꼼하고 정확한 드로잉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근법이나 단축법을 사용하면서 우첼로처럼 꽉 막히지 않았다. 원래 계산된 발의 크기를 줄이고, 하체를 천으로 덮는 융통성을 발휘하여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연출했다. 또한 사용한 안료가 흥미롭다. 베네치아에서도 유화 물감이 유행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안료를 기름이 아닌 아교를 개어 섞는 디스템퍼 기법을 사용했다. 유화보다 색감이 뚜렷하지 않지만, 차분한 느낌을 준다. 마침 작품의 주제와 맞아떨어진다. 만테냐가 재료의 특성까지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1살 때부터 가까운 파도바에서 그림을 배웠다. 파도바는 당시 토스카나의 도나텔로와 파올로 우첼로가 활동한 곳으로, 덕분에 과학적인 회화 기법인 원근법, 단축법, 해부학으로 무장했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은 1453년에 만테냐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화가 집안인 자코포 벨리니의 딸 니콜로시아와 결혼했다. 당시 파도바가 베네치아에 합병되었을 때로, 같은 해 그는 파도바에서 <성 루가 제단화>를 제작했다. 이후 50년 가까이 만토바 곤차가 후작 궁정화가를 하며 작은 롬바르드 궁정을 르네상스 회화로 이끄는 선구적인 공방으로 변모시켰다. 굳이 이런 성장 배경을 밝히는 까닭은 그가 피렌체의 정밀한 소묘와 베네치아의 색채를 조화시켜 이탈리아 전통 양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탈리아 전쟁, 그 대단원의 종말(1536~1559, 제6~8차 전쟁)


1535년 밀라노의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손이 없는 가운데 사망했다. 영원한 숙적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후임 밀라노 공작 직위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었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려 하자 프랑수아 1세가 반발하여 전쟁이 재개됐다. 1536년 3월 프랑스는 피에몬테 지방을 거쳐 토리노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해군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해안 도시를 공략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양면 전쟁을 부담으로 여긴 카를이 수락하여 1538년 6월 니스에서 평화 조약을 맺고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손에는 달랑 토리노 하나만 남았다. 조약을 중재했던 교황 바오로 3세는 분이 안 풀린 프랑수아와 카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주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외쳤던 바로 그 교황이다.  


1541년 8월 21일 오스만 군대가 헝가리 부다를 점령하자 카를이 무리하여 원정길에 올랐다. 악천후로 인해 선박이 침몰하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이듬해 7월, 프랑수아가 오스만과 동맹을 맺고 다시 신성로마제국에 선전포고했다. 프랑스-오스만 함대는 1543년 8월 당시 카를의 영지였던 니스를 점령했다. 반면 카를과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1544년에 북프랑스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군 협력이 원활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의 반격에 속수무책이 되었다. 결국, 점령 지역을 단념하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1547년 같은 해에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가 모두 죽었다. 메디치가의 카테리나와 정략 결혼한 앙리 2세(재위 1547~1559)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삼촌인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견제코자 주선한 결혼이었다. 앙리는 1551년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치고 유럽에서 주도권을 행사코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초기 로렌 공격에 성공한 이후 이탈리아반도의 토스카나 침공을 시도했지만, 1554년 마르차노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1559년 카토-캉브레시스(Peace of Cateau-Cambrésis, 캉브레지) 조약을 수락하고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로써 여덟 차례의 이탈리아 전쟁은 모두 끝났다.


그러나 앙리의 불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그해 조약의 일환으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맏딸 엘리자베트와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의 결혼 축하 마상 창 시합에 참가했으나 사망했다. 근위대장의 젊고 건장한 아들 가브리엘 드 로루주의 창 자루가 앙리의 안구를 뚫고 뇌를 훼손했다. 대회에 참석하면 중상을 입을 것이라는 유명한 점성가 고리코의 예언을 두 번이나 전한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말을 흘려들은 참극이었다. 

앙리 사후 50여 년에 걸쳐 내전에 휩싸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위그노, Huguenot) 간 죽음을 불사한 참혹한 전쟁이었다.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세 아들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으나 그들은 어리고, 무능하고, 게을렀다. 왕비 카테리나가 섭정을 했는데, 그녀는 딸인 스페인 왕비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하느님은 내게 세 아이와 분열된 왕국을 주셨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그녀의 마지막 28년 동안 프랑스는 여덟 차례의 전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위그노파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모든 사람을 만족하려 했던 그녀는 오히려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반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잔인했다는 일부 평가가 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위협 하에서도 종교의 자유가 정착하는 기반을 조성한 점은 높이 사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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