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네, 색채 미술의 전통을 세우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베니스)의 생경함은 말로써 상상을 불러오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탄생 과정은 절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곳은 567년 훈족과 게르만족에 쫓긴 난민들이 바다에 꾸민 보금자리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갯벌을 건너며 잠시 머무를 줄 알았던 곳이었다. 알프스의 회양목 수천만 개를 갯벌에 박고, 흙을 덮어 육지를 만들었다. 118 개의 섬을 연결하고 400여 개의 다리를 놓으면서 오늘날의 베네치아가 완성되었다. 도시를 예술품처럼 여기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극심한 고통이었다.
10세기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는 지중해의 교역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해양 공화국들이 성장했다. 아말피, 피사, 제노바, 그리고 베네치아이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전 예루살렘에 병원을 운영하는 요한 기사단을 설립한 아말피는 노르만 왕국에 병합되었다. 피사는 제노바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몰락했다.
십자군 전쟁은 1차, 4차, 7차 때가 의미가 크다. 그중 4차 원정에서 출발지로 선정된 베네치아는 철저히 자신의 이해에 집중했다. 1202년 11월,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집트로 향할 예정이었던 본대의 행로를 돌려 차라(Zara, 자다르)로 향했다. 베네치아와 동맹 관계를 철회하고, 헝가리 왕의 비호를 구한 차라를 손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국가에 대한 약탈과 학살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십자군은 파문을 당했다.
이때 큰아버지 알렉시우스 3세의 폭정을 피해 신성로마제국에 망명 중인 비잔틴의 젊은 알렉시우스(훗날 알렉시우스 4세가 된다)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큰아버지 알렉시우스 3세의 폭정을 피해 신성로마제국에 망명해 있었다. 십자군 총사령관인 몬페라트의 후작 보니파키우스를 찾아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아버지 이사키우스 안겔루스의 왕위를 되찾아 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정복에 직접 동행하든가, 아니면 1년간 성지에서 봉사할 1만 명의 병사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500명의 기사를 부양하겠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돌려놓겠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이 매력적인 제안은 특히 동방 무역의 독점을 노리는 베네치아 도제(Doge, 선출직 총독) 엔리코 단돌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성지를 회복한다는 십자군과 대의명분, 즉 성전(聖戰)은 존재하지 않았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사흘 동안 철저히 약탈했다. 1203년 8월 1일, 장님 이사키우스 2세가 다시 황제에 복위했고, 알렉시우스 4세가 공동 황제로 앉았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는 외국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900년 자부심이 무너트렸다. 백성들은 복종과 세금 부과를 거부했고, 황제의 압제에 저항했다. 1204년 ‘무르주플’이라는 별명을 갖은 황족의 쿠데타에 의해 알렉시우스와 이사키우스가 살해되었다.
담보가 사라지자 콘스탄티노플을 다시 장악한 프랑스인과 베네치아인은 도시를 약탈하고 신성을 모독했다. 선거인단을 지명하여 '라틴제국'의 황제로 보두앵 1세를 선출하고, 제국의 영토를 분할했다. 선출된 황제에게 1/4을 할당하고, 나머지 3/4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프랑스 영주들이 똑같이 나눠 가졌다. 특히 베네치아는 네그로폰테(에우보이아)와 크레타섬을 차지함으로써 아드리아해와 지중해 동쪽을 연결하는 해상 강국으로 우뚝 선다.
이 과정에서 동과 서로 찢겨 나간 민심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봉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베네치아는 자연스럽게 상인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견고한 부르주아 귀족정치가 구축되었다. 상인의 선구자 격인 고대 페니키아인은 무역상 필요에 의해 간편한 문자 알파벳을 만들어냈던 사람들이다. 셈이 빠르고 두뇌가 뛰어났다는 의미다. 베네치아인 역시 예술이 인간의 감성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이며, 특히 시각언어의 역할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더불어 화가들도 현실적인 동기, 즉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원했다. 예술도 돈이라는 기름진 토양에서 잘 자라는 법이다.
15세기까지 비잔틴 미술과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던 베네치아 미술은 조반니 벨리니 주도하에 독창적인 혁신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16세기 초 베네치아 화가들은 유럽 전역에 누드라는 새로운 주제를 전파했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은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로부터 시작됐다. <잠자는 비너스(1510)>는 서구 회화에 있어서 ‘누워 있는 여인의 누드’라는 모티브를 제공했다. 바로크 시대의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고야와 신고전주의자 앵그르, 사실주의자 쿠르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때는 신화 속 인물에게만 허락된 누드였다. 같은 스승의 문하에 있던 후배 티치아노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누드화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탄생한다. 조르조네의 비너스가 관조적 태도를 지녔다면,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풍경이 차단된 침실이란 공간에서 눈은 뜬 채 정면을 응시하는 도발적인 모습이다. 고전적 여신이 아니라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를 연상케 한다. 1880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가장 역겹고 혐오스러우며, 음란한 그림이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근대 누드화의 전범(典範)으로, 마네의 <올랭피아>로 진화했다.
스승 조반니 벨리니에 이어 무려 6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 공식화가로 활동한 티치아노는 사형 조르조네와 3년간 함께 생활했다. 그는 넉넉한 사람으로, 아낌없이 티치아노에게 주었다. 새로운 주제 누드에 대한 관심, 구성에서 풍경, 그리고 자신이 창시한 캔버스-유화를 연계한 기법까지 모든 영광을 티치아노가 누리도록 했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는 이렇게 색채를 중시하는 베네치아 화풍을 완성했다. 베네치아 항에 수많은 배가 왕래했고, 다양한 염료를 구하기 쉬워서 발전한 화풍이기도 하다.
1510년, 그는 서른두 살 이른 나이에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서는 시대를 앞선 근대성이 발견된다. 회화 장르로서 풍경화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폭풍>을 남겼다. 그리고 티치아노와 공동 작품이라고 결론이 난 <전원 음악회>는 구성과 인물의 배치를 훗날 인상주의 선구자 마네가 <풀밭 위에 점심식사(1863)>에서 차용하여 더욱 유명해졌다.
조르조네가 활동했던 시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유럽의 열강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반도 내 유일한 세력이었다. 체사레 보르지아가 몰락한 이후 로마냐 공국에 속했던 도시들이 베네치아로 넘어왔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들 도시의 반환을 위해 애썼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마침내 1508년 베네치아가 교황의 승인 없이 비첸차 주교를 임명하자 교황은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선전했다. 이렇게 전개된 제3차 이탈리아 전쟁은 주역들이 바뀌고 나서야 종결되었다. 프랑수아 1세와 훗날 에스파냐 카를로스 1세(훗날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가 그 주인공이다. 1516년 프랑스 누아용(Noyon)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골자는 반도의 상황을 캉브레 동맹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허망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