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가 그린 <교황 레오 10세와 두 명의 추기경>이다.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위대한 자’ 로렌초의 차남 조반니이며, 동년배인 미켈란젤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나중에 덧그린 두 명의 추기경은 그의 조카들로 왼편이 줄리오 데 메디치(훗날 클레멘스 7세가 된다), 오른편이 루이지 데 로시이다.
아버지 로렌초는 1492년 다가오는 임종의 순간을 느끼고 장문의 유언장을 썼다. 열일곱 살에 추기경의 붉은 모자를 쓴 조반니에게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이 한 가지를 반드시 엄숙하게 지키기를 바란다”며 마지막 말을 맺었다.
“제발 아침에 일찍 좀 일어나도록 해라.” (김상근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서른일곱 살에 즉위한 교황은 어릴 때부터 낙천적이고 오락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고통을 피하려 했다. 재위 중 교황청과 관련된 일은 조카 줄리오 추기경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문화생활과 함께 연회와 사치에 몰두했다. 골치 아픈 정사를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516년 피렌체를 다스리던 동생 줄리아노가 죽었다. 1517년에는 시에나의 알폰소 페트루치를 비롯한 추기경들이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 사건을 적발했다.
불안했던 그는 정국을 수습하려고 집안 인물을 포함하여 서른한 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했다. 피렌체뿐 아니라 교황령 군대를 앞세워 1519년에 죽은 조카 로렌초의 후임 우르비노의 군주까지 가문의 인물들로 채웠다. 그러나 교황청 내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폐단을 초래했다. 그리고 교회 재정이 바닥나자 사제직과 면죄부(免罪符)를 팔았다.
그림은 1518년 9월, 우르비노 대공 직위를 받은 로렌초 2세의 결혼 축하연 때 메디치궁전 문의 상단에 걸려 공개되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띤다. 교황 앞에 있는 탁자 위에는 값진 물건과 성서가 세밀화처럼 그려졌다. 수 놓은 능직 옷도 화려하다. 그중 교황의 벨벳 카마우로(모자)와 모체타(망토)가 압도적이다. 작품은 집단 초상화 성격을 띠었지만, 두 추기경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교차점에 교황이 앉아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켜 교황의 권위를 존중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레오 10세의 자세와 표정이 경직되었다. 눈은 부릅떴지만, 초점이 불안하다. 때는 마틴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갈등이 표면화된 지 1년 뒤에 의뢰된 작품이다. 교황의 내면에 있는 고민이 드러났다. 라파엘로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교황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책과 정교한 무늬로 장식된 은종(銀鐘)으로 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지만 살이 찐 교황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간적 연약함은 어쩌지 못했다.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라는 중요한 정치적 국면을 맞이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 대신 카를 5세의 재력과 권력을 선택했다. 어차피 돈 선거였다. 손자 카를 5세를 위해 막시밀리안 황제가 15만 4,000 플로린을 풀었다. 카를은 만장일치로 황제에 선출되었다.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프랑수아는 선제공격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 했다.
1521년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간 ‘왕조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프랑스 발루아 왕가와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간 각축전이었다. 전쟁은 예상 밖으로 프랑스군이 연전연패했다. 당시 황제군과 연합했던 교황 군은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유일한 군인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가 지휘했다. 연합군은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해 1월 3일 루터를 파문하여 상황이 어려웠던 교황은 말리아나 별장에서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그날 얻은 오한으로 12월 1일 재위 9년 만에 4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듬해 예상 밖의 인물 하드리아누스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카를 5세가 어린 시절 개인 교사였던 그는 국왕 부재중에 에스파냐를 통치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주교와 추기경에 이르기까지 질병이 퍼져 있다고 판단했다.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독일 제후들에게는 정치 투쟁을 멈추고 신앙인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의 반발로 개혁에 실패했고, 재위 21개월 만에 독살되었다.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되살려냈다. ‘위대한 자’ 로렌초로서는 저승에서 몹시 흡족했을 일이다. 단순히 아들에 이어 조카까지 교황이 되어서가 아니다. 파치 가문의 음모로 동생 줄리아노가 암살당한 이후 그의 손에서 쭉 성장한 조카였기 때문에 더욱 대견했을 터였다. 그에겐 교회 재정을 개선하고 개혁을 추동할 재능이 있었다. 그랬더라면,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도 막아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로서 철학이 부족했다.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간 반목을 부추겨 반사이익을 도모하려 했다. 1524년 12월에는 자신이 몰아붙였던 프랑수아와 비밀 조약을 체결하고 카를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를 공략하던 프랑수아는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포로 신세가 됐다. 프랑스는 왕의 석방 교섭에 힘쓰는 한편 이교도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와 동맹을 맺어 유럽 내 충격을 안겼다. 프랑수아는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1526년에 풀려났다. 교황은 포로로 잡힌 프랑수아를 버리고 서둘러 황제와 조약을 맺음으로써 위기를 벗어났다.
이 굴욕적인 사건은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플랑드르 지역의 이해 때문에 황제 편에 섰던 잉글랜드가 크게 후회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유럽의 세력 균형을 깨고 신성로마제국을 도왔기 때문이다. 헨리는 황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교황이 제창한 코냑 동맹에 가담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에스파냐가 기독교 권역의 주인이 되는 조약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 그리고 에스파냐의 학정에 저항하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 결정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교황은 영적 지배에 자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속세 유럽은 이미 카를 5세의 세상이 되었다는 점을 깜빡했다. 1526년, 20대 젊은 황제 카를이 분통을 터트렸다. 교황이 지난 3년간 저지른 비열한 행동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그리고 분연히 군대를 일으켰다. 교황은 산 안젤로 성(Castel Sant’Angelo, 산 탄젤로 성)에 유폐되었으며, 신성동맹을 포기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러나 다시 약속을 번복했다. 황제는 교황의 수호자 역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선대 황제가 선물했던 교황령으로 진군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동맹군은 분열을 일으키며 지리멸렬했고, 로마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보수의 독일 용병은 사흘 동안 교회 재산의 약탈했고, 르네상스 건축물과 예술품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였으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바로 1527년에 벌어진 ‘로마 대약탈(Sacco di Roma)’ 사건이다. 이로써 로마 르네상스의 시대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클레멘스는 행상인으로 변장하고 산 안젤로 성을 빠져나와 폐허가 된 로마를 찾았다. 그러나 신도들은 황제가 교황보다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난 뒤였다. 교황의 영이 서지 않았다.
기회를 이용하여 베네치아는 교황령에 속한 라벤나를, 페라라와 우르비노의 공작들은 교황에게 빼앗긴 자기 영토를 되찾았다. 영국의 헨리 8세도 황제 카를의 이모인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황을 압박했다. 이후 프랑수아 1세는 다시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해 보았지만, 나폴리 공성전에 패배한 후 1529년 동맹에서 이탈하였다. 이 와중에 피렌체에서 반란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을 세 번째로 추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는 피렌체의 권력을 되찾는 데 급급했다. 에스파냐 바르셀로나로 황제를 직접 찾아갔다. 이면계약을 맺고, 황제의 군대를 빌려 피렌체를 포위했다. 대신 1530년 2월 24일 카를 5세의 대관식이 치러졌다. 피렌체는 무려 10개월간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황제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 Medici, 1510~1537)를 공작에 봉함으로써 주종관계를 분명히 인식시켰다.
1533년 피렌체 공국이 출범했다. 피렌체인이 사랑했고, 일찍이 단테와 <피렌체 연대기>를 쓴 역사가 빌라니가 굳게 믿어 마지않던 피렌체의 공화정 체제는 이로써 산산이 조각났다. 클레멘스가 죽고 2년이 흐른 1536년에 알레산드로가 카를의 사생아인 오스트리아의 마가레트(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이로써 이면계약의 모든 전모가 현실로 드러났다.
최초 세습군주가 된 알렉산드르는 로렌초 2세 혹은 클레멘스 교황의 사생아라는 주장이 맞선다. 하지만 명백한 점은 그가 무능했고 폭정을 휘둘렀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는 명문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직계 남성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족적을 남겼다. 1537년 스물여섯 살 알레산드로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게다가 살해를 주동한 인물이 작위를 물려받아야 할 친척 로렌치노였다. 따라서 먼 방계의 인물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I de' Medici, 재위 1569~1574)가 이어받았다. 그는 피렌체를 다시 강력한 도시국가로 탈바꿈시켰으나 지나치게 잔혹하여 그 공이 묻혀버렸다.
1569년 교황 피우스 5세가 피렌체와 시에나 공국을 병합하여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영예는 그 후손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뿌리가 흔들렸다고 볼 수 있다. 지도자가 개인적인 탐욕과 권모술수로 통치하려 들면, 세상은 불행해진다. 국부 코시모가 지하에서 통탄했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