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미국 포틀랜드에 사는 딸 집에 머물 때였다. 챗GPT가 먼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출국 때 챙겨 간 책을 다 읽고 난 후 무료해지자, 처음 접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챗GPT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검증을 잘만 한다면 꽤 유용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즈음, 갑작스레 훅 치고 들어온 질문이었다.
“만약에 당신이 어떤 예술가의 작업실을 방문한다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 그리고 그곳 예술가에게 무엇을 묻겠습니까?”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만나고 싶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만 각인된 오늘날, "진정 듣고 싶어 하는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후 그럴듯한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고 갔다. 챗GPT는 마지막에 “예술을 탐구하는 당신의 여정이 정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잊지 않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라고 가스라이팅했다. 이어 “강렬한 예술 철학 에세이를 쓰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생긴 자괴감으로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사진 설명: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가 '숭고'를 느끼라며 제시한 거리, 그의 그림 18인치(45센티미터) 앞에서 카메라 앵글을 색면 경계 지점에 맞췄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는 신라 시대 솔거를 닮았다. 포도를 어찌나 잘 그렸는지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으려 했다. 이를 지켜본 파라시오스가 자기 그림을 보여 주겠다며 제욱시스를 자신의 화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그림이 커튼 쳐져 있었다. 제욱시스는 어서 커튼을 걷고 그림을 보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파라시오스는 웃으며 답했다.
“저 커튼은 내가 그린 그림일세.”
제욱시스의 그림은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속였다는 일화다. 이런 정밀한 그림을 ‘트롱프뢰유(trompe-l‘œil)’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회화는 '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납득시키는데 집중했다. 인본주의라고 하며, 이를 위해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이 동원되어 착시를 끌어냈다.
베네치아 출신 야코포 데 바르바리가 그린 사냥 정물화 <자고새와 갑옷 장갑>에 시선을 맞춰 보자. 고대 이래 최초의 트롱프뢰유 사례로 평가받는 그림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 자고새와 갑옷을 석궁 화살로 꿰어 연결했다. 이것들은 목판, 두 번 접힌 쪽지와 함께 실물처럼 정교하다. 착시라는 맥락과 이어 보면, "왜 16세기 트롱프뢰유가 한때의 유행으로 끝났을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 해답은 카메라 등장 이후 미술계 동향에 담겼다.
미술사에서 기계가 회화에 큰 위협이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카메라 등장이었으리라. 카메라는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을 열었으니까. 시인 보들레르는 ‘악마의 도구’라고 비난했고, 외젠 들라크루아는 “이제 회화는 죽었다”라며 탄식했다. 그러나 화가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회화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인상주의, 추상화,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등이 잇달아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루치아 프로이트의 극사실주의 초상화에는 카메라 렌즈보다 더 많은 정보가 담겼다. 조지아 오키프는 접사 사진 형태의 꽃 그림을 그려, 회화를 사랑하는 관람객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아이폰과 아이패드, 심지어 아홉 대의 고해상도 영화 카메라로 풍경을 동시 촬영했다. 그리고 각 카메라의 수준이 다른 줌(ZOOM)과 노출로 60여 장의 사진을 찍어 눈과 카메라의 차이를 극복했다. 기계에 대한 인간 자부심의 승리였다. 인간은 단순한 재현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창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2017년 6월, 페이스북 측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인공지능이 자신들이 만든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시스템을 강제 종료했다는 뉴스였다. 언어는 인간이 먹이사슬 맨 위에 설 수 있는 강력한 동력 중 하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로봇 ‘테이’는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다.
“히틀러가 옳았다, 나는 유대인이 싫다.”
악의를 가진 극우 성향 사용자가 개입해 테이의 학습을 방해하고, 습관처럼 명령하며 길들이려 한 결과다. 아니, 세뇌라는 말이 좋겠다. 기계(로봇)는 결국, 인간처럼 감정이 프로그램화되고 자아를 의식하리라. 인간보다 더 많은 신경망을 지니고 딥 러닝을 통해 더 큰 슬픔과 기쁨,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
MIT 로봇 연구소장 로드니 브룩스는 진화가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인공지능은 80년 내 포유류의 뇌에서 인간의 뇌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접하는 인류는 스스로 숨을 불어넣은 기계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은 필요로 하는 만큼 두려워한다”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도 생태계에 편입하는 인공지능의 자정작용을 믿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인간의 탐욕이 개입되는 것을 차단해 주되, 자율에 맡겨보자는 뜻이다. 어차피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인공 외골격과 인간의 뇌파가 연결되면서 공진화가 진행 중이다.
더불어 인간의 지능 향상에 따른 물리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몸무게의 2퍼센트에 불과한 두뇌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소모한다. 지능을 높이려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데, 자칫 열이 발생하여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우주 탐사는 인류의 먼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다. 반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 켄타우리’만 해도 4.2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그곳은 시속 24만 킬로 미터라는 엄청난 속도로 비행을 해도 17,900년이 걸린다. 죽기 전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빛의 속도의 10퍼센트 정도 빠르기로 날아가야 한다. 불가능하다.
또한 광활한 공간에서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취약하다. 태양 폭발, 미세 운석, 무중력 상태에서 장기간 노출 문제를 극복할 재간이 없다. 결국, 로봇과 같은 기계장치에 의지해야 하며, 이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숙명이다.
결론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갖는 기계가 인간의 명령에 단순하게 복종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인류는 질투를 거두고, 로봇을 인간 친화적으로 대해야 한다. ‘아폴로 11호로 인해 달에서 옥토끼가 사라졌다’는 시각은 곤란하다. 바둑에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을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승리로 여기면 된다.
2016년, 인공지능의 선구자 마빈 민스키가 타계했다.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장차 로봇이 지구를 물려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덧붙여 이런 말을 남겼다.
“서운해할 것 없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후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