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한다.
“나는 가슴속에 두 마리 늑대가 싸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단다. 한 늑대는 이기심과 분노와 비판하는 늑대이고, 다른 늑대는 연민과 친절과 사랑의 늑대란다.”
손자가 묻는다. “그럼, 할아버지 가슴속에는 어느 늑대가 이겨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그야 내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낸 드마스의 ≪당신은 정직한가≫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자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두 마리 늑대가 새끼를 낳고, 그 늑대들이 다시 새끼를 낳으면서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변종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문 사진: 튀르키예 이스탄불 시내 밤 풍경)
앙소르의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그는 벨기에 화폐에 등장하는 국민 화가다. 생전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그는 뭉크와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가면, 해골, 유령을 주요 모티브로 작품 활동을 했기에 ‘가면의 화가’로 불렸다.
그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가면 뒤에 숨은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중앙에 자신의 민낯을 그려 넣고, 주변을 온통 가면으로 둘러쌌다. 아니, 가면 모두가 자기 내면의 모습일 수 있다.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사회적인 모습, ‘페르소나’다.
이탈리아 희극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전체적인 구성이 우리 마당극 하고 비슷했다. 장터나 광장 등 사람들이 모이는 어디에서나 가설무대를 세운 후 가면을 쓴 배우들이 공연을 펼쳤다. 대본이 아니라 즉흥 연기에 의존했기에 배우들의 재간과 호흡이 중요했다.
18세기에 이르자 이탈리아 극단 ‘코미디 델라르테’가 파리에 등장했다. 관객들이 감정적 정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열광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정부 마담 멩트농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루이가 죽고, 오를레앙공 필리프가 섭정하면서 이탈리아 희극이 다시 프랑스에 상륙했다.
배우들의 가면은 프랑스 희극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벗겨졌다. 배우의 표정을 보여 주어 관객의 공감을 유도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피에로는 슬픈 표정으로 분칠 했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웃으면 안 되는 ‘슬픈 광대’였다.
역설적으로 피에로의 이런 이미지가 바로 웃음의 포인트였다. 전혀 우습지 않고 오히려 슬퍼 보이는 외모와 달리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노출하자, 그것이 펀치라인을 만들어 관객의 폭발적인 웃음을 자아냈다. 찰리 채플린, 미스터 빈과 같은 코미디 효과라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코미디언도 개인적인 슬픔조차 웃음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가 되었다.
얼굴에 가면을 쓰면, 대신 마음의 가면을 벗어 놓는다.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비군의 노상 방뇨 정도의 일탈은 애교로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악(惡)이 쓰는 가면은 위험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보편적 가치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에게서 관련 사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약 10개월간 뉘른베르크에서 나치의 핵심 전범 24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평화에 반한 죄, 전쟁 범죄, 반인도적 범죄 등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당시 전범들은 신문 과정에서 모두 “그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들은 몰랐을까? 이성이 잠든 순간, 괴물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1961년 4월 11일, 독일계 미국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 재판을 참관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의외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그 자신이 아니라 악이 위장한 가면이었다.
예일 대학의 스탠리 밀그램 교수가 악명 높은 실험을 했다. 두 명의 실험 대상자를 각각 다른 방에 배치한 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토록 했다. 답이 틀리면, 질문자는 대답한 사람에게 전기충격을 가해야 했다. 그리고 대답이 틀릴 때마다 전압은 점점 더 높아졌다.
실험엔 기만 장치가 있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배우였으며, 그는 일부러 오답을 제시했다. 물론 전기충격은 가해지지 않았고, 대신 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연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짜 실험 대상자인 질문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상대방을 고문하고 있다고 여겼다. 고통을 느낀 그들은 멈춰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연구원이 나서서 "이 실험이 중요하다"라며 중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상자 65퍼센트가 그 얘기를 듣고 난 후 실험을 지속했다. 중요한 점은 이때 참가한 사람들이 범죄자가 아니라 모두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연구원의 말 한마디에 고문하는 행위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과연 당신은 65퍼센트의 실험 대상자와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머리가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다.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은 조선이 자랑하는 천재였다. 그들의 훼절, 즉 친일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삶의 좌표를 잃었거나 조국이 독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가치관이 핵심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최악의 무지는 지식의 가면을 쓴 무지였다. 요즘 우리 사회에 전문가들의 교활한 지식이 횡행한다. 편협하고 수상쩍은 지식보다는 폭넓고 솔직한 무지가 더 낫다. 오만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끝없이 자신을 성찰, 반성해야 한다. 내 안에 있는 연민과 친절, 그리고 사랑의 늑대에게 꾸준히 먹이를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