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창작' 번역은 문화의 힘

by 노인영

1517년, 서른네 살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을 출발점으로 기독교 개혁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흔히 인쇄술에서 찾는다. 맞는 말이다. 루터가 태어나기 30여 년 전, 마인츠의 구텐베르크와 하를럼의 로랑 코스테르를 필두로 독일 북부 지역에서는 이미 활판인쇄 기술자들이 꽤 많았다.

1455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경≫은 가동 활자로 제작된 유럽 최초의 서적이었다. 필경사가 한 권의 성경을 쓸 시간에 구텐베르크는 180권을 제작했다. 1462년을 기점으로 인쇄공들이 라인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1500년쯤 유럽에는 대략 천 대의 인쇄기가 최소 236개 지역에서 가동된 것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번역은 인쇄술에 비해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루터의 반박문은 최초에 라틴어로 쓰였다. 그것을 독일어로 요약, 벽보 형태로 배포하면서 불과 2주 만에 관련 내용이 도처에 알려졌다. 또한 개혁이 시작되기 이전 독일어 성서 판본이 19개였고, 프랑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 판본은 24개가 존재했다. (뤼시앵 페브르와 앙리 장 마르탱의 ≪책의 탄생≫)

성서의 자국어 번역은 간단치 않은 작업이었다. 교회는 라틴어를 공통어로 강요했고, 그 해석을 독점적으로 주재했다. 언어의 독점은 권력의 독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자국어 성서는 교회의 권력 집중을 무너뜨리기 위한 선결 과제였다. 반박문 게시 이후 루터도 독일 영주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은신하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대중에게 신앙을 돌려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종교 개혁'이란 용어에 저항이 있다. 기독교의 내부 문제를 왜 종교 전체로 확대하느냐는 이의 제기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의 분열'이라고도 한다. 나는 '기독교 개혁'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대한민국 국보, 김정희의 <세한도(184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이 길어지자, 아무도 추사 김정희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적이 중국 연경에서 어렵게 구한 ≪경세문편(經世文編)≫을 추사에게 선물했다. 그는 중국을 자주 오가던 통역관으로, 선물로써 책의 가치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세도가에게 바치면, 출세를 보장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추사는 그의 의리에 가슴이 뭉클해졌고, <세한도>를 그려 보답했다. 왼쪽 발문은 공자의 시 “겨울이 깊어진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 잣나무가 우뚝 솟은 줄을 안다”라는 뜻으로, 이상적의 마음을 여기에 대입했다.

(대문 사진: 두물머리에서 만난 <세한도> 음각)


추사 이전 세대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은 스물여덟 살에 급제, 벼슬을 살다가 마흔부터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중 그는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하여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다산은 유교 경학(經學)뿐 아니라 천문, 지리, 과학 등에도 밝았다. 그중 ≪마과회통(1798)≫은 홍역에 관련된 잘못된 치료법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의학 지식과 치료 방법을 소개했다. 일종의 예방 접종이라고 할 수 있는 종두법이 실린 최초의 서적이기도 하다. 그는 슬하의 6남 3녀 중 4남 2녀를 모두 천연두로 잃었다. 그 슬픔을 추슬러 책을 펴냈으니, 실학자로서 그의 위대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본인의 창작물이냐?'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1814?)≫가 더 뛰어나다. 그는 15년간 흑산도 유배 중에 그곳 227종의 어류를 분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 비교는 의미 없는 짓이다. 모두 세상을 구하는 산지식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의 글이 모두 중국어, 즉 한자로 쓰여 그 정보와 사상이 대중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 대입해 보면, 번역의 놀라운 확장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은 돌궐과 전쟁 중 외국 여행을 금지한다는 칙령을 어기고 중국을 벗어났다. 스무 살에 머리를 깎고 7년간 불경을 연구하면서 석가모니의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이후 그는 16년 동안 말을 타거나 걸어서 인도를 여행했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인더스강을 건널 때였다. 힘들게 구한 필사본 두루마리와 조각상 등을 배에 실은 후 현장 자신은 코끼리를 탔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교차하면서 강물이 배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이로 인한 피해는 상당했다. 현장은 여정을 중단했고, 몇몇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새로운 필사본을 간청해야 했다. 몇 달 뒤 귀중한 자료들을 간신히 챙겨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새로 즉위한 황제가 칙령을 어긴 현장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관직까지 내려주었다. 그는 관직을 사양하는 대신, 불교 수도원에서 수집한 문헌을 번역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유명한 ≪대당서역기≫를 썼고 방대한 번역 작업을 마치자, 그의 명성이 드높아졌다.

현장의 경험과 번역은 중국 불교가 인도 불교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중국 불교는 계속 번성했고, 불자들이 굳이 인도를 찾지 않고 집에 머물러도 무방하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반면 인도 불교는 브라만들이 힌두교를 개혁하자, 쇠퇴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작품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을 준 영국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가 2024년 11월 12일 '한강과 번역에 관하여'라는 기고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2016년 영국의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한강과 공동 수상했다. 기고문에서 그녀는 "우리(번역가들)의 공헌이 인정받는다면 기쁜 일이겠지만, 그 공헌이 과장 없기를 바란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작가의 천재성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번역의 도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번역은 단순 작업이 아니다. 외국 고유의 정서를 제대로 옮기는 작업, 예를 들어 ‘아줌마’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창작이다. 대한민국 대중도 이번 과정을 통해 번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으리라 생각한다.


번역이 문화 수준에 비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1500년 전후 종교 서적은 판매량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출판물이었고, 루터는 이미 ‘돈이 되는 작가’였다. 그의 저서는 1518년에서 1535년 사이에 판매된 독일어책 가운데 3분지 1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출판물이 루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루터 이전 이탈리아반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서로 밝혀졌다. 문헌학에 통달한 로렌초 발라가 있어 가능했다. 증여 문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교황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교황의 권위를 무너뜨린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당시 피렌체 시민의 문맹은 극히 드물었다. 크리스티앙 베크가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인 582명의 유품 목록을 분석했는데, 그중 책이 무려 1만 574권이나 등재되었다. 1인당 평균 18권이었다. 당시 책이 고가 소장품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큰 숫자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 같은 부유한 후원자가 희귀한 고전 텍스트를 찾아내 신선한 번역을 거쳐 완성한 필사본을 지속적으로 공급한 덕분이었다.


세계적으로 지금 K-컬처가 뜨고 있다. 2025년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650만 7483명을 기록했다. 세계 최상위 수준이다. 하지만 K-컬처의 지속 여부는 결국,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자, 우리도 온라인 서점에서 10퍼센트 할인 가격으로 책 한 권을 사자. 그래서 K-르네상스에 동참하자.


참! 한 가지, AI 기반 자동 번역 솔루션과 관련 간단한 언급이 필요할 듯하다. 오늘날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 신경망으로 인해 번역이 점점 정확하고 문맥에 맞아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또한 구두 대화에서도 '(확률적) 앵무새' 단계를 벗어나 동시통역이 조만간 가능하리라 기대된다. 그러나 여전히 일상적 차원의 소통이다. 따라서 창작 수준에 이르는 인류의 번역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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