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직접 역사를 쓰기 전까지 사냥의 역사는 언제나 사냥꾼을 위대하게 묘사할 것이다.”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가 서구 백인들의 편견과 왜곡이 담긴 역사적 서사를 이렇게 꼬집었다.
역사는 나침반이다. 늘 정북(正北)을 가리킨다. 그 아래 거친 사막이 있는지, 깊은 협곡이 있는지는 나침반의 위치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교훈을 도출하기 위한 역사의 재해석은 끝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
(대문 사진: 공중에서 본 이과수 폭포 '악마의 목구멍')
세상을 일깨우는 데 있어서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웅 사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먼저 코르시카의 가난한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의 허망한 삶을 되짚어 보자.
쿠데타 성공 후 제1 통령 나폴레옹의 제2차 이탈리아 원정이 시작되었다. 1800년 5월 15일, 나폴레옹 군은 눈이 쌓인 해발 2,469미터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었다. 이 원정의 승리로 그는 종신 통령, 이어 황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화가가 그린 당시 현장이 매우 대조적이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 함께 대혁명에 투신했던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현실과 타협했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라의 죽음>을 그렸던 그는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을 완성했다. 그의 장기인 프로파간다 회화를 통해 나폴레옹이 만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다비드는 구도를 사선으로 처리했다. 병사들이 대포를 밀고 올라가는 이곳이 가파른 협곡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왼쪽 바위엔 나폴레옹과 함께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2000년 전 코끼리를 끌고 알프스를 넘어 고대 로마인을 대경실색게 했던 장군의 영웅적 기상과 연결하려는 의도다.
나폴레옹은 잘생긴 백마의 고삐를 쥐고 오른손을 뻗어 능선을 가리킨다. 목적지가 지척이라며 병사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것이다. 붉은 망토와 말의 결기에서도 그의 진취적인 존재감이 뚜렷하다. 그러나 그림에서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은 절박감을 보여주는 그의 눈빛뿐이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로슈의 <알프스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가 비교적 고증에 충실했다. 생베르나르 고개는 말을 타고 넘을 수 없는 험지다.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 군은 4파운드/8파운드 포, 곡사포 각각 두 문씩을 소리 없이 끌어야 했다.
노새가 제격이다. 암말과 수탕나귀의 종간 잡종인 노새는 인내심이 강하고 힘과 지능이 뛰어나다. 겁이 많은 말과 달리 피부도 단단하여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른다. 그러나 다비드의 그림에는 노새의 희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화가의 능력을 십분 이용할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 다비드의 정치적 변절을 감싸 안은 대가로 얻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유념할 것은 들라로슈의 작품도 풍자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웅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고 했다.
한니발은 "길을 찾지 못하면 만들겠다"라며, 위험을 감수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무위(無爲)가 최고의 지혜인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 패배 이후 여러 나라를 전전했다. 결국, 비티니아에서 로마로 넘겨질 위기에 직면하자,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폴레옹의 욕망과 죽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1815년 엘바섬에서 탈출, 워털루 전투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면서 그의 새로운 신화는 100일 만에 끝났다. 이때 나폴레옹은 두고두고 후회할 선택을 했다. 미국 대신 영국으로 망명지를 정한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증오감을 품었던 영국은 황제를 전쟁포로로 대했다.
그는 이질이 창궐하는 남대서양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5년 반을 지내다가 마침내 사망했다. 1821년 5월 5일, “프랑스, 군대, 군대의 수장, 조제핀”을 유언처럼 중얼거린 후 마지막으로 큰 숨을 세 번 쉬고 죽었다. 사인은 위암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요즘 역사적 진보는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가 실현되었을 때 일어난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도 자기 소신을 차분하게 지키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쯤,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클리블랜드 거리에서 단정한 차림의 40대 흑인 여성이 막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귀갓길이던 그녀는 백인 자리를 피해 ‘유색인 자리’ 맨 앞 좌석에 앉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백인 좌석이 전부 찼고, 두세 명의 백인이 서 있게 되었다. 운전기사가 흑인 네 명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했고, 세 사람이 일어나 뒤로 갔다. 이때 미국이 더 나은 나라로 바뀌는 데 기여하는 결정적인 한 마디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안 돼요(No).”
버스 기사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로자 파크스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대꾸했다. “그러시든지요.” 도착한 경찰은 ‘분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벌금 10달러와 재판비용 4달러도 함께 부과됐다. 그날 오후, 몽고메리 권익개선협회는 파크스를 위한 집회를 열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그 자리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압제의 무쇠 같은 발에 짓밟히는 이 삶도, 결국 진력나는 순간이 옵니다. 인생의 7월이라는 반짝이는 햇살로부터 떠밀려 알프스의 11월, 날카로운 한기에 내동댕이쳐지는 이러한 현실에 진력이 나는 순간이 옵니다.”
이후 381일간 버스 보이콧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11월 13일, 연방대법원은 몽고메리의 흑백 분리 버스 탑승 제도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조그만 저항? 그녀에겐 삶 전체를 담보한 도전이었다. 파크스에게는 병든 어머니가 있었다. 또 소송을 건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가 직장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한 고소인이었다.
인권 운동이라는 엄청난 의미 부여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그저 평범한 신앙인이자, 정직한 시민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위한 집회였음에도 킹 목사에게 연설 순서를 양보하라는 제의에 터럭만큼 불쾌감이 없었다. <뉴욕 타임스>는 킹을 1면 기사에 두 번 다루었지만, 당사자인 그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녀에겐 이에 대한 섭섭함도 없었다. 우리는 그녀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일러 용기라 부른다.
엊그제 방송을 통해 ‘픽셀 라이프’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 '픽셀'처럼 우리의 삶이 작고 세밀하게 쪼개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최초 소비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러나 삶의 가치 추구라는 면에서도 이제는 작고 짧은 경험을 많이 누리는, 즉 ‘찰나의 순간’을 조립하며 살아가는 태도 변화를 의미한다.
해방 이후 지나치게 거대한 담론에 함몰되어 살아온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개인 간 픽셀 크기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픽셀은 없다. 하나하나 묵묵히 자기 위치에서 해상도를 높일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얼마든지 밝아질 수 있다.
<나 하나 꽃 피어>
- 조동화 -
나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