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맞벌이와 버지니아 울프

by 노인영

좋은 세상이다. 미국에 사는 손녀의 커가는 모습을 대한민국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딸이 아기의 생활공간을 볼 수 있도록 홈캠을 단 후 통신망을 연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3개월간 산후조리를 도왔던 아내는 귀국 후 시차에도 불구하고 태블릿 PC를 거의 끼고 산다.

생후 10개월 된 손녀가 요즘은 엄마, 아빠에게 알 수 없는 말로 목소리를 높인다. 교감이다. 그런데 어제 아내가 손에 고무장갑을 낀 채 영상 전화를 받던 중 아기가 “엄마’, “하나, 둘”했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그렇다고 쳐도 “(원, 투가 아니라) 하나, 둘”이란 말엔 그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딸이 출산 휴가 4개월, 육아 휴직 3개월을 먼저 썼고, 지금은 사위가 3개월짜리 육아 휴직 중이다. 다행히 엄마가 출근해도 아기는 아빠하고 잘 지낸다. 딸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시 비웠던 공간을 급히 사랑으로 가득 채운다. 아기도 덩달아 동작과 목소리에 흥분이 실린다.

딸 부부의 보육이 쉽지만은 않았다. 시아버지 상을 당해 6개월 차 아기가 장시간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우려가 컸다. 또한 작년 말 회사가 20퍼센트 정리 해고에 들어갔다. 한 해 대부분 자리를 비웠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딸이 매니저에게 전화했다.

“회사가 필요하다면, 1개월 앞당겨 출근할 수 있다”라며 나름 충성심을 피력했다. 그러자 남편으로서 맞벌이하며 아이 둘을 키운 매니저가 단호하게 말했다.


“육아 휴직은 당신의 정당한 권리다. 급한 일 생기면, 전화할 테니 아기 돌보는 데 집중하라.”


(대문 사진: 미국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에서 아이를 돌보는 두 쌍의 부부)




베르트 모리조의 <요람(1872)>

인상주의 최초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대표작 <요람>이다. 두 개의 삼각형 구도가 겹치면서 엄마와 아기가 서로 연결된다. 엄마의 오른손은 요람을 보호하듯 감쌌고, 시선은 반투명 커튼을 헤집고 들어가 잠든 아기에게 고정했다. 모성애적 몰입이란 이런 것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르트에겐 이브, 에드마,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로코코 화가 프라고나르의 증조카였던 세 자매 모두 어려서부터 미술을 배웠다. 하지만 이브는 양재 기술을 배우겠다며 일찌감치 미술을 그만두었다. 에드마와 베르트가 끈기 있게 재능을 이어갔다.

둘 중 에드마가 베르트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에드마는 스물아홉 살에 해군 장교와 결혼하면서 화가의 길을 포기했다. 베르트는 몹시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언니가 선택한 운명도 그리 나쁘지 않다”라고 위로해야만 했다. <요람>의 모델이 바로 에드마와 그녀의 둘째 딸 블랑슈다. 에드마는 동생의 모델을 서면서 과연 어떤 상념에 빠졌을까?


여자의 덕목을 가정에서 찾아야 했던 시대였다.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짜며, 피아노를 치거나 가방에 수를 놓는 일'에서.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여자가 상등석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1층 뒷좌석이 허용되었는데, 그나마 남성이 동반해야 앉을 수 있었다. 여성 화가도 보호자(샤프롱) 없이 미술관 또는 야외 사생이 금지되었다. 하물며 누드화는 모델을 구하기도, 그리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여성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그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남성 화가들은 이를 두고 실력 차이로 치부했다.

이런 어려운 여건임에도 인상주의 전시회에 가장 열성적인 참여자는 바로 베르트였다. 그녀는 여덟 차례 중 무려 일곱 번이나 동참했다. 서른일곱 살에 무남독녀 쥘리를 임신하면서 제4회 전시회만 불참했다. 이러한 결과로 에드마가 작품 두 점을 남겼지만, 베르트는 무려 860여 점이나 완성했다.



박인환은 시 <목마와 숙녀>에서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라고 했다. 영국 태생의 울프는 모더니즘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작가이다. 양성애자였고, 쉰아홉 살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그녀는 구걸하듯 얻은 신문사 일자리로, 원숭이 쇼를 기고하고 결혼식 취재 기사를 썼다. 그리고 봉투에 주소를 기입하고, 노부인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조화를 만들고, 유치원 어린이에게 철자법을 가르쳐 주며 몇 파운드를 벌어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사과와 샌드위치 한 개로 버티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1920년, 숙모 메리 비턴의 유언으로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 당시 500파운드는 3만 6,500 달러, 원화 약 5천만 원 정도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전업 작가로 활동했고, 닭고기와 커피 그리고 웨이터 서비스가 포함된 만족스러운 외식 비용을 지급할 수 있었다.


울프는 그간 서러웠던 경험을 에세이 ≪자기만의 방(1929)≫에 녹여냈다. 책에서 그녀는 귀족이 아니기에 교육받지 못했던 중산층 여성이 픽션을 쓰기까지의 어려움을 피력했다. 그리고 여성의 지위 향상 문제가 대체로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힘주어 강조했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지적 입지에 서려면, 위엄은 물론 똑같이 교육받을 권리와 ‘연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여성이 소설이나 시를 쓰고자 할 때 돈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며, 방은 사유할 수 있는 독립적 공간을 뜻한다. 이 점은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모든 창작 활동에 적용되는 페미니즘의 위대한 강령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미개했다. 예를 들어, 인류 최초의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하여 대개의 법체계에서 강간을 재산권 침해로 다루었다. 달리 말해 강간의 피해자가 당사자인 여성이 아니라 그 여성을 소유한 남성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이거나, 남편이거나.

여성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늘 가난했다. 울프는 21세 이후에도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하며, 심지어 싱글 맘은 더 열악한 상황에서 책 쓰기는커녕 글 읽을 시간도 없게 되리라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여성 자신이 수입을 직접 관리하는, 즉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근력 하나로 허세를 부리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시대는 노동력의 공백이 생길 때마다 변곡점을 맞았다. 중세 말에 발생한 흑사병과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가 대표적이다. 여성의 노동력이 절실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위상이 높아졌다.

산업 혁명 이후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체하자, 유럽은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예컨대 1847년부터 프랑스에서는 10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는 공장에서 67만 명의 남성 노동자와 함께 25만 4천 명의 여성과 13만 명의 아동이 일했다.


오늘날을 일러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한다. 컴퓨터·인터넷의 혁명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초연결과 초지능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여성의 노동력이 남성에 비해 질적으로 밀릴 게 없어졌다. 울프의 강령, 여성에게도 ‘연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갖출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늘날 결혼 생활에서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한다는 사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이 경제적으로 성공해야만, 가정에서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든 남성 입장에서는 새로운 위기 상황을 맞은 것이다. 남성성의 역사적 변화를 연구한 로버트 그리스울드(Robert L. Griswold)가 1993년에 한 말은 오늘날 맞벌이 가정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돈을 버는 것은 아버지들의 삶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중요 요소다. 가족을 부양하는 의무는 아버지의 자의식과 어른다움 그리고 남성성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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