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ossible is nothing!”
2004년 제108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 시 현수막에서 발견했던 멋진 구호다. 그러나 그 진정한 의미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4시간 2초의 기록으로 완주한 다음에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자부심이 강한 도시, 미국 보스턴에서는 1897년 이래 매년 4월 세 번째 월요일 ‘애국자의 날’에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대한민국에서는 1947년 서윤복이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괌을 거쳐 대회에 참가, 세계 신기록을 경신했다.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3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2001년, 이봉주가 우승했다.
한편 대회는 1975년 최초로 장애우가 휠체어를 타고 참가하는 등 각종 전설을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1966년, 스물세 살 로베르타 루이스 기븐슨이 3시간 21분 40초 만에 완주했다. 여성 최초의 마라톤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배번을 달지 못한 채 비공식적으로 출전해야 했다. 당시 성별과 관련한 규정은 없었으나 잘못된 의학적 통념과 성차별로 인해 여성 참가가 금기시되고 있었다.
이듬해 캐서린 스위처가 자신의 이니셜 ‘K.V. 스위처’만 쓰고 공식 등록했다. 하지만 3킬로미터 지점에서 감독관이 달려와 그녀를 끌어내려했다.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난 그녀는 4시간 20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함으로써 첫 여성 공식 마라토너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도 주최 측이 실격 처리했고, 아마추어 육상연맹에서도 그녀를 제명했다. 1972년 대회부터 여성의 참가가 공식 허용되었다. 그러자 스위처는 1975년 보스턴 대회에 다시 출전하여 생애 최고 기록 2시간 51분 33초로 2위를 차지했다.
이후 1984년 LA 올림픽부터 여자 마라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17년, 일흔 살이 된 그녀는 또다시 보스턴 대회 참가했고, 무사히 완주했다. 마라톤은 남을 상하게 하는 운동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성은 이런 차별적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남성과 동일한 출발선상에 설 수 있었다.
(대문 사진: 2017년 조지아텍 가을 학기 박사 학위 수여식. 격세지감, 학위를 취득한 많은 여성이 보인다)
<거울 속의 비너스>는 스페인의 자랑, 벨라스케스의 유일한 여성 누드화다. 비너스는 아들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 흐릿하게 비칠 뿐,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준다. 하지만 관람객은 비너스의 시선이 자기 얼굴이 아닌 어느 곳을 향했는지 눈치챌 수 있다. 남성의 관음성을 불러일으키는 치명적인 도색 그림이다.
유명한 방탕아이자, 총리대신의 아들인 데 아로(훗날 카르피오 후작)가 의뢰한 작품이다. 당시 종교재판소에서는 누드화를 그리거나 심지어 개인이 집안에서 소장하는 행위까지 금했다. 따라서 국왕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등에 업은 벨라스케스가 신화의 이름을 빌어 저지른 일탈이라고 보아야겠다.
1914년 3월 10일, 그림 속 비너스의 등이 매리 리처드슨이란 여인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 지도자 팽크허스트의 구속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리처드슨은 팽크허스트가 "비너스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위대한 현대 역사의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6개월간 복역을 마치고, 그림도 복원한 지 한참이 지난 1952년에 '왜 하필 이 그림이냐?'는 질문을 받고 리처드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를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남자들이 날마다 줄을 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 꼴 보기 싫었다.”
여성의 누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금기시되었다. 그때는 벗고 다니는 것이 예사로운 시대였기에 관음성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의 육체가 완전치 못해 자연의 무질서만 일으킨다는 편견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벌거벗을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는 뜻으로, 여성을 향한 지독한 멸시였다.
반면 남색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고, 심지어 가장 고귀한 형태의 사랑으로 권장되기까지 했다. '신들의 왕' 주피터의 동성 연인이 바로 미소년 가니메데였다. 그다음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고, 여자와 여자의 사랑, 즉 레즈비어니즘은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겨 처벌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화가들에 의해 조금씩 여체의 아름다움이 다루어졌다. 이 또한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었지만.
역사를 통틀어 남성은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을 규정하며 부당하게 차별해 왔다. 남성은 그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했다. 반면, 여성은 '여자의 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야 했다.
여성 차별의 기원은 인종이나 신분보다 훨씬 깊다. 여성의 평등권은 꽤 오래전부터 보장된 듯해도 사실은 최근의 일이다.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프랑스 대혁명에서조차 그 과실은 오로지 남성, 그것도 온전히 부르주아의 몫이었다.
여성 참정권은 소위 유럽 선진 제국이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가 1893년에 처음 인정했다. 이후 북유럽이 도입했고, 영국은 1928년이 되어서야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미국은 1870년 흑인에게, 1920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대한민국은 1945년에 도입되었으나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 그것도 제한적으로 수용했다.
천재의 역사에서도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음악, 미술에서 여성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 없었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수학했던 첫 번째 부인 물리학자 밀레바 마리치는 상대성 이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명성을 포기했고, 1919년 이혼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상금 전액을 받기로 합의했을 뿐이다.
퀴리 부인은 여성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공동 수상했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1911년에는 단독으로 노벨(화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의 능력을 평생 의심했다. 여성은 오직 천재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며, 홀로 아이를 돌보고 대필까지 해주는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해야 했다. 괴테에게 버림받은 폰 슈타인 부인은 이웃인 실러의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우리가 돌보아야 할 그토록 많은 자질구레한 일에서 천재보다 더 큰 정신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지 못해요. 심지어 그들은 명예와 부를 얻지만, 우리에겐 그런 정신력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죠.”
시몬 드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동거했다. 그녀는 파리 지성계에서 활동하면서 본인이 부당한 대우나 차별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르트르보다 열등하게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녀는 ≪제2의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여자라고 규정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길들여졌을까? 정작 여성 자신이 성적 차별성을 내면 깊숙이 각인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보부아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받아들였다. 1949년에 얼굴을 드러낸 책은 세상에 여성주의적 실존주의의 출발을 알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칫 내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고 오해할지 모른다. 고백건대, 난 결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전히 가부장적 찌꺼기가 남아 있다. 단,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이 부당하게 차별받던 시대가 걷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여성이 독립된 성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 여성의 평등성은 투쟁이 아니라 실력으로 입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