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말, 미국 공군은 잦은 추락 사고로 전전긍긍했다. 최악일 때는 하루 17명이 사고를 경험했다. 처음에는 제트엔진 항공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생긴 문제로 인식했다. 하지만 여러 기종에서 동시다발로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라이트 공군기지 항공의학연구소 소속 길버트 S. 대니얼스 중위가 실마리를 풀었다.
사실 공군은 1926년부터 조종사 신체의 평균 치수에 근거하여 전투기의 각종 규격을 표준화해 왔다. 줄자로 조종사들의 팔다리 길이를 재던 대니얼스는 ‘평균치에 딱 들어맞는 조종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조종사 4,063명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종석 설계와 연관성이 높은 10개 항목을 설정, 평균값을 구했다. 그리고 이와 일치하는 조종사 숫자를 확인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0개 전 항목에 걸쳐 평균 범위에 들어간 조종사, 즉 ‘평균적인 조종사’는 한 명도 없었다. 공군은 부랴부랴 개인 맞춤형으로 설계를 변경하여 조종석 시트, 가속페달, 헬멧 조임 끈 모두 조절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미 공군은 지구 최강의 공군으로 도약했다.
‘평균의 함정’ 혹은 ‘평균의 종말’이라고 한다. 마치 수영 못하는 사람이 강을 건너면서 평균 수심을 고려하는 행위와 같다. 관련 사례는 곳곳에서 잠복해 있다.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1인당 국민총소득(GDP)도 그중 하나다.
최근에도 정부가 2025년 1인당 GDP는 3만 6,024달러로, 일본과 대만을 웃돌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비교를 위한 참고용으로, 각 가정의 실제 경제 형편과 무관하다. ‘가처분 소득’을 지표로 사용해야 한다.
가처분 소득은 가계 수입 중 소비와 저축 등으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을 말한다. 조금 더 실생활에 와닿게 표현하자면, 일반 시민이 실제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소득이다.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면, 각 가정의 재정 관리와 소비·저축 계획을 합리적으로 세울 수 있다.
크벤틴 마시스의 <환전상과 그의 부인>이다. 남편이 저울로 주화의 무게를 달고 있다. 저울은 공정, 정직을 상징한다. 그러나 돈이다. 성모자 그림이 있는 ‘매일 기도서’을 경건하게 읽던 부인의 시선이 저절로 그쪽으로 옮겨간다. 오른쪽 마시스의 또 다른 <환전상>과 비교해 볼 때 이 그림도 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한 작품이다.
화가가 20년 이상 활동했던 앤트워프는 16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가장 발전한 국제 항구 도시였다. 따라서 환율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 금·은 외화는 무게로 가치를 평가했을 것이다. 또한 고리대금업자로도 통하는 환전상이 금, 수정, 진주 등 귀금속을 취급하고 있다. 전당포 역할도 겸했나 보다.
구약성경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족에게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성령에 어긋나는 죄”임을 명기했다. 하지만 대안이 필요했다. 1179년부터 교회가 이자 받는 기독교인의 파문함과 동시에, 이방인인 유대인에게 고리대금업을 공식 허용했다.
덕분에 유대인은 금융 전문가가 되었고, 부를 축적했다. 1185년, 아론이라는 유대인 대부업자가 1만 5,000파운드를 430명에게 빌려주었는데, 이 규모는 당시 잉글랜드 연간 국고 수입의 4분지 3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중 지중해 지역에서 무역이 활발해지자, 무역상들이 자본금을 빌려 쓰는 경우가 흔해졌다. 이때의 주요 기축통화가 피렌체의 '플로린'과 베네치아의 '두카트’였다. 이민족 간 환전의 형식을 빌려 돈거래와 이자를 지급하면서 성경의 굴레를 피해 갈 수 있었다.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중심이 된 초기 상업자본주의가 형성 과정에는 복식부기가 큰 역할을 했다. 복식 기장은 단순히 현금과 재고의 흐름만 기록하는 장부가 아니다. 거래 또는 투자의 각 유형에 대한 이윤을 비교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던 루카 파치올리가 복식부기 전파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1494년 베네치아에서 ≪산술집성≫을 출간했다. 600쪽 분량의 수학책으로, 그중 부기를 다룬 부분은 제9권의 27쪽에 불과하다. 그러나 손익 계정을 만드는 법, 재무제표 초안을 작성하는 법, 연말 결산하는 법 등 복식부기의 원칙과 실제를 완벽할 정도로 명확하게 제시했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빚으로만 인식, 기피했던 부채가 자산 계정에 편입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용을 밑천으로 빌린 금융 부채는 회전율이 높아 운용하기에 따라 몇 배 이상의 소득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복식부기를 받아들인 피렌체에 국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상인은행이 무려 80개나 되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상업 부흥은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기독교인에 의한 유대인 차별은 필연적이었다. 유대인은 기독교인과 같은 집에서 거주할 수 없었으며, 기독교인 재판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다. 이런 반유대주의는 유럽 각국의 국왕을 비롯해 개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재산의 약탈과 학살로 이어졌다. 그중 특히 심했던 곳이 스페인(에스파냐)이었다.
스페인은 1492년 1월 ‘레콩키스타(기독교인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를 완성했다. 기독교 순혈주의의 승리로,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쫓아냈다. 그 와중에 종교재판소의 마녀사냥이 본격화되면서 스페인이 자랑하던 다양성과 혼종성이 급격히 자취를 감추었다.
유대인 추방 칙령이 나온 지 1년 후 세비야 집세는 반으로 떨어졌고, 바르셀로나의 은행들이 파산했다. 더불어 ‘화수분’ 라틴 아메리카의 금과 은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30년 종교 전쟁으로 국가의 빚이 가중되었다. 유대인과 이슬람인의 재능이 사라진 상황에서 스페인 왕실은 결국, 파산 선고했다.
반면 스페인의 속령 네덜란드는 자본주의적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칼뱅이 당시 태동한 부르주아 계급에 의지하려고 5퍼센트 이자율 한도 내에서 대부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온 유대인과 유럽 각지의 신교 이주민이 몰려들었고, 그들로 인해 산업과 문화에서 유효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대인이 주축이 되어 1602년 동인도 회사를 주식회사로, 도시가 금융과 보험이 기반으로 한 물류기지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네덜란드가 세계 최강 중상주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리고 해상 무역의 위험성이 분산되자, 조선업과 해운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영국 제품을 대륙 각지로 ‘연결해 판다’는 뜻으로, 유럽에 없던 최초의 비즈니스 모델인 ‘중계 무역’을 창출했다. 마침내 1609년부터 1651년까지 네덜란드 황금시대가 열렸다.
지금 대한민국 자산 시장에서 투자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 부동산이 아니라 주식·채권 등 금융 소득으로의 관심 전환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상당히 늦었다. 그리고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하다. 성공하면 투자이고, 실패하면 투기일 수 있다. 성공해야 한다. 하지만 대중의 금융 지식이 아직 일천하다.
경제적 자유를 빨리 누리겠다는 조급함으로 한 방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한 방에 훅 간다. 기업의 재무제표 볼 줄 알아야 하고,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포트폴리오 구성, 가치 투자, 분할 매수 및 매도 등 교과서적인 고언을 새겨들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헨리 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다시 한번 운을 시험하고, 남성은 다시 한번 위험을 무릅쓴다.”
이 차이가 대한민국 주식 투자자 중 50대 이상 여성의 실적이 제일 좋은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투자자 스스로 시장 변동성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지 않으면 기회가 없고, 팔지 않으면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10퍼센트 손실에 가슴이 벌렁거린다면, 주식 투자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 모든 투자가 자신과 가정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