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년은 라파엘로가 죽은 해로, 이때쯤 회화가 완성도에 있어서 극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새로운 회화 양식 ‘마니에리스모’가 탄생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새로운 양식은 로소 피오렌티노(조반 바티스타 디 야코포), 야코포 다 폰토르모, 도메니코 베카푸미 같은 젊은 화가들이 시작했다. 17세기 초, 즉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가 교차하는 기간에 유행했다. 영어로는 ‘매너리즘’이라 불리는데, 요즘의 부정적인 뜻과는 달리 기존의 틀, 즉 원근법과 해부학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미술을 비트는 양식이다.
'마니에라(maniera)', 즉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라파엘로 등 위대한 화가의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 최상의 미술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니에리스모는 별도로 시대를 구분 짓는 특별한 화풍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났던 비사실적이고 신비로운 요소를 강조했다고 보아야 한다. 미술사에서도 잠시 과도기적인 양식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가가 비례를 어겼다고 비웃는 대신,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심오한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리오넬로 벤투리, <미술비평사>)
르네상스 미술이 그리스인처럼 이성에 부합하려 했다면, 마니에리스모는 인간 내면의 반쪽, 즉 감성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바로크를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완벽하여 영원할 것 같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이 새로운 변이로 인해 진화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독일 고전 철학자의 말처럼 “다른 시대에는 다른 영감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겠다.
야코프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1556?)는 미켈란젤로가 아꼈던 제자다. 미켈란젤로는 그 자신이 고전적으로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정점에 올랐다.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겉모습을 답습하는 회화의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화가이기도 하다. 그 흔적은 ‘뒤틀린 자세(사행 곡선, 蛇行曲線)’가 출현한 <톤도 도니(1503, 제목 그림 참조)>와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폰토르모는 <시스티나 천장화>에서 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이 프레스코화 작업을 할 때 한 번 비계에서 내려와 자신의 그림을 쳐다보았다. 20m 아래에서 바라본 그림에서 그는 그간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적인 세부 묘사가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그는 과감하게 핵심적인 메시지만 강조하는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로 인해 작품 제작에 속도가 붙어 4년 6개월 만에 간신히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폰토르모가 마니에리스모의 선구자로서 흔적은 최대 걸작 <이집트에서의 요셉(1515~18)>에서 처음 발견된다. 요셉을 네 번이나 등장시켜 파나로마 같은 세월의 흐름을 한 공간에서 압축, 표현했다.
그러나 “마니에리스모를 선포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527)>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서 사용한 색채를 사용한 작품에는 제목과는 달리 십자가도, 사다리도 없다. 그리고 죽은 예수의 모습 역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피에타>에서 옮겨왔으나 아무래도 마리아가 보여주는 처연함에 시선이 모아진다. 결정적으로 르네상스 시대 내내 회화의 세계를 지배했던 원근법의 소실점이 사라졌다. 그리고 인체는 비례를 무시하고, 길게 늘였다. 매우 작위적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모티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때의 모습은 어차피 그가 목도한 장면이 아니다. 따라서 사실성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주관을 깊이 개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재현을 통한 아름다움에 충실했던 당시 미술 경향을 거스를 수 있었던 이유다. 단순한 외양의 변화가 아니라, 회화에 관한 폰트로모의 철학적 태도가 바뀌었다는 방증이다. 불안, 불안정, 혹은 불완전을 즐긴 것이다. 이렇게 피렌체 마니에리스모를 이끈 그의 혁신성은 20세기 초 그리스 출신 화가 데 키리코의 초현실주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마니에리스모는 물결은 시기상으로 크게 두 번 출렁인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초기 마니에리스모'와 1527년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로마 약탈 이후 예술가들이 유럽 전체로 흩어지면서 양식이 확산하는 시기이다. 확장기의 거장들 가운데는 ‘파르마에서 온 작은 사람’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1540)가 있었다. 코레조(안토니오 알레그리)에게 영향을 받아 바로크적 장식 발전에 초석을 세운 볼로냐의 안니발레의 뛰어난 제자가 바로 파르미자니노이다.
그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볼록거울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발소에서 쓰는 볼록거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거울 안에 비친 건물과 출입문의 구부러진 형상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여기서 불균형적인 구도와 비현실적인 단서를 발견한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 모습은 가까운 부분은 확대되고, 멀리 있는 부분은 작아진다. 그림 속 손과 뒤에 출입문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쉽다. 이미 마니에리스모 양식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1524년, 라파엘로 공방에서 그는 로소 피오렌티노와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해 로마에서 자신을 후원해주게 되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선물했다.
그의 대표작 <목이 긴 성모 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성모자상의 대표적인 인물 라파엘로처럼 단순하고 자연스럽지 않다. 조화와 균형에 대한 반작용, 연금술에 매료되었던 그의 내면이 드러난다. 성모 마리아의 긴 목과 손 등이 전체적으로 신체 비율과 맞지 않는다. 왼편 구석에 몰려 있는 천사들은 균형이 안 맞고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아기라기에는 덩치가 큰 예수의 미끄러질 듯한 자세도 불안정을 가중한다. 전체적으로 라파엘로의 우아함과 매너리즘의 긴 인체 비례 그리고 알레고리(寓意)가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런데 이런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얼굴 경계의 모호한 처리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이다. 동시에 작품 전체에 걸쳐 바탕을 이루고 있는 부드러운 황금빛 색채는 다가오는 바로크의 화려함을 예고한다. 아쉬운 점은 파르미자니노가 37세에 요절함으로써 작품은 미완성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설명할 때 포함했어야 할 인물이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이다.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중간 세대이다. <성 마르코의 기적>은 그의 데뷔작으로, 등장인물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소위 '뒤틀린 자세'로, 그를 매너리즘 화가로 분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은 베네치아 수호성인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다. 베네치아는 828년 성 마르코(마가)의 유골을 알렉산드리아서 옮겨와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후 복음서의 저자 마르코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날개 달린 사자'가 국가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프로방스의 한 노예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을 다녀왔다가 벌을 받았다. 그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성 마르코가 하늘에서 나타나 해방했다. 그리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각종 고문 기구를 다 부숴버렸다. 틴토레토는 건축물과 도구들을 단축법으로 그려 다채롭게 구성했다. 특히 인물 구성이 뛰어난 이 작품은 ‘스코올라 디 산 마르코’란 평신도 단체가 주문했다.
티치아노가 주로 상류층을 대상으로 했다면, 틴토레토는 중류층의 그림을 그렸다. 가격 차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신 그는 기본적으로 머리 회전과 붓질이 빨라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는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그리되, 나머지는 간략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사실적인 표현으로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렸을 때와 다르지 않다. 실제 그는 20대 후반부터 미켈란젤로에게서 자극을 받았고, 베네치아에서 도외시했던 데생을 연마하는 등 기본기가 탄탄했기에 가능했던 작품이다.
틴토레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그를 베네치아의 대표자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틴토레토는 ‘어린 염색공’이란 별명이다. 티치아노 사후 베네치아 화풍을 이어갔으며, 그가 가장 많이 그린 주제는 <최후의 만찬>이다. 그가 사망한 1954년에 완성한 작품이 가장 유명한데,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는 구도와 주제에서 대조적이다. 특히 빛의 효과가 인상적이다. 바로크의 싹을 틔워냈다. 그의 작업실 벽에 "티치아노의 색채,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이라고 적어 놓았다. 상당한 자부심이다. 그러나 틴토레토가 죽자 베네치아 회화도 동력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