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난다’라는 뜻의 라틴어 레나스키(renasci)를 어원으로 한다. 외피적으로는 과거, 즉 그리스 시대의 예술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움직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에게 예술은 미메시스(mimesis), 즉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이었다. 그들에게 미(美)는 선(善)과 동일시되는 도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하학적 비례와 동일시되는 수학적 성격을 가졌다. (리오넬로 벤투리, <미술비평사>) 이런 배경에서 르네상스인들은 원근법을 발명했고,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명암법으로 옷 주름을 취급했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문화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진실에 더 가깝다. 브루넬레스키 주변의 미술가들은 미술의 부활을 너무나 열렬히 갈망했기에 자연과 과학, 그리고 고대의 유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는 의미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여정에서 인간에 관한 탐구로 인해 필연적으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신이 인간의 영혼을 지배했던 시대가 중세라면, 르네상스는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긍정이다. 즉 현실 세계가 합리적인 질서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고로 대체되는 시대였다. 결과적으로 문예의 재생이며 예술, 과학, 문학 및 유럽 각국 언어의 발달로 나타났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1>) 역사가 쥘 미슐레가 1855년 <프랑스사>에서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언제로 정하느냐에 관해서는 견해가 나뉜다. 정치적으로는 1450년대부터 1600년쯤으로 가름한다. 문화적으로는 13세기 후반부터 약 2세기 동안 이탈리아반도에서 지속한 혁신적 변화를 지칭한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럼, 르네상스 이전 ‘문화적 암흑기는 또 언제냐?’는 질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529년이 시작이고,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날이 그 종말이다.
그러나 전환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 등장한 시대 구분이며, 역설적으로 단절을 강조하는 방법론이다. 15세기 이전에도 고대에 대한 관심이 강렬히 되살아난 순간들이 있었다. 9세기 경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최초의 미술사가로 대접받는 조르조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1568)>에서 ‘부활’이라는 의미의 리나쉬타(renascita)를 사용했다. 이 역시 중세와 구분되는 용어로, 이탈리아 피렌체 중심의 관점이었다.
문화적 르네상스에서도 1453년이 중요하다. 정치적 변곡점을 가져온 이때를 전후하여 콘스탄티노플과 근접한 이탈리아반도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이 다시 유행했다. 그리고 그 중심지가 피렌체였다. 그것이 로마, 베네치아로 전파되었고, 적어도 미술에 있어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반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공간적으로 좁게 해석한 원인으로는 스위스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서 르네상스를 이탈리아 미술의 이미지만으로 제한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이런 관점이라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마치 들불처럼 유럽 전체로 번진 문화 운동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우선 르네상스 문화를 향유한 저변이 취약했다. 대다수 시민은 계몽의 대상이었을 뿐이고, 소수 지배층만이 그 혜택을 누렸다. 그러니 일정 분야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부여해 주기가 망설여진다.
한편 중세 말에 발생한 흑사병은 유럽 봉건사회 전반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유럽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2,5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졌고, 농노와 여성의 위상이 달라졌다. 또한 당시 많은 성직자가 자신의 안위에 급급했다. 그리고 희생된 성직자를 대체한 새로운 인원들은 자질 면에서 하향 평준화되었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기댈 곳은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종교적 대의에 피곤을 느꼈고, 대신 개인적 삶의 가치에 눈을 떴다.
이때 인쇄술 발달이 대중을 계몽했다. 삽화를 보면서 글을 깨쳐 성경을 이해했고, 이렇게 형성된 성숙한 의식은 종교개혁을 추동했다. 상대적으로 교권의 약화와 함께 중세적 세계관은 시나브로 걷혔다. 교회 내부에서도 신앙과 세속의 분리되는 모습이 점차 또렷했다. 13세기에는 신학에 예속되었던 철학이 힘을 쓰기 시작했고, 14세기에는 교부철학과 스콜라 철학이 나누어져 이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이 활발해졌다.
결정적으로 이탈리아반도를 제외한 서유럽에서도 문화적 진보가 중단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중세 후반 대륙에서는 독자적으로 로마네스크(11세기에 자리 잡은 그리스·로마의 건축 양식) 양식이 고딕으로 바뀌었다. 당시 건축은 미술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분야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선진 고딕 양식은 천장이 높아지고, 벽은 얇아졌으며, 창문이 넓어졌다. 고트족의 양식이라는 홀대에도 이탈리아반도 내 밀라노 대성당과 베네치아 도제 궁전에서 수용되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세 조각으로 분열된 이후 유럽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총 13차례의 십자군 원정 중에도 패권 경쟁에 몰입했다. 그러나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무역업이 성장했으며, 화폐 경제 도입과 시장의 확대 등으로 호황을 누렸다. 덧붙여 문명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사고가 유연해졌다. 이를 빗대어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결국, 이탈리아반도의 15개 도시국가들이 먼저 수혜를 입었을 뿐이다. 그중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 베네치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반도는 지정학상으로 대륙과 소통이 취약하다. 위로 알프스가, 삼면은 지중해로 둘러싸여 섬과 같다. 따라서 문화적 르네상스도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몇몇 도시국가에 한정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피렌체 나아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유럽 전체가 놀랄 만한 문화적 충격을 가져온 동인(動因)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부풀린 주장이다.
추정컨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를 필두로 그곳에서 단테, 보카치오, 알베르티, 부르넬레스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갈릴레오 등 시대의 천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데서 기인한 착시 현상일 수 있다. 이탈리아 왕국의 통일은 1861년 3월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베네치아는 제외되었다. 르네상스가 국민 통합으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미안하지만, 위대한 문화 사조 르네상스를 탄생한 피렌체로서는 자신의 지방 언어가 이탈리아 국어가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르네상스가 끝난 15세기,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맞이한다. 정치·경제·문화의 활동 무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졌다. 폭력적이던 그들은 무력과 질병을 앞세워 경쟁적으로 신대륙 시장을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에 대한 끔찍한 살육과 수탈이 자행되었다. 그들에겐 이 잔혹한 역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가 유럽의 문화적 우월성이며, 문명화 논리다. 이런 맥락에서 르네상스를 포장했기에 그 이면에 유럽의 문화적 독선이 드러난다.
이제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끌어낸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공간을 옮겨 그곳 미술까지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후기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끝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