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까지도 프랑스 인구의 1/4은 프랑스어로 말하지 않았고, 또 다른 1/4은 프랑스어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백년전쟁은 오늘날과 같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유럽의 11세기에는 왕이 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시대로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는 신념이 널리 퍼진 시대였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세가 사망했다. 그는 세 번씩 결혼을 했음에도 후사를 이을 사내아이를 두지 못했다. 적통으로는 누나 이사벨의 아들이자 잉글랜드 플랜테저넷 가문의 왕인 에드워드 3세가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남왕 필리프 4세의 동생의 아들, 즉 방계인 조카 필리프 6세(재위 1328년~1350년)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했다. 이렇게 새로운 발루아 왕조가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왕위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정통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조성되었다. 선왕의 유언과 "왕국은 너무도 존귀하므로 여성의 수중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옛 프랑크 '살리크 법'까지 끌어들였다. 이 결론은 향후 프랑스 왕국 헌법의 기초로 작동하여 여왕이 등장할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다. 샤를 4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는 이듬해 기옌 공국과 퐁티외 지방의 영주로써 새로운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윌리엄 노르망디 공작이 세운 잉글랜드 국왕은 당시 기옌 지방의 공작으로써 프랑스 국왕의 제후라는 이중 구조를 지녔다. 결국, 1300년대로 접어들기 직전부터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 프랑스의 현실적 위세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영역 내 강대한 잉글랜드의 왕이자 신하인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불편했다. 당연히 두 나라는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는 스코틀랜드 데이비드 2세를 지원했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왕위 찬탈자임을 선포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프랑스 인의 입장에서는 발루아와 플랜테저넷 가문 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식했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와 기옌 공국의 보르도 지방을 목표로 했다. 전쟁 초기 행운이 찾아왔다. 작위 계승과 관련한 갈등으로 브르타뉴 몽포르 백작이 프랑스로부터 등을 돌려 잉글랜드 편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브르타뉴는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하며, 노르망디와 인접한 요충지다. 그리고 1340년에 백년전쟁의 첫 전투인 슬라위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지상전에서 지지부진했다. 에드워드 3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1346년 노르망디로 상륙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캉을 공략한 후 카엔 전투와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했다. 무기 체계에서 압도적으로 앞섰다. 잉글랜드 군의 장궁은 화살을 갈아 거는 속도에서 월등하게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석궁 한 발을 발사하는 동안 6인치 자루로 이루어진 장궁은 대여섯 발을 쏠 수 있었다. 게다가 장궁은 14세기 후반에는 400야드 거리까지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석궁의 살상력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쇠미늘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다. (마이클 하워드, <유럽사 속의 전쟁>) 그리고 프랑스군은 기사도를 앞세우며 기사 간 전투를 고집하면서 공격 대열이 무질서했다. 잉글랜드 보병은 1346년 8월 26일 토요일 크레시 전투(제목 그림)에서 거의 세 배나 많은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서양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다.
귀국하는 길에 에드워드는 도버와 마주한 프랑스 북부 칼레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칼레는 부르고뉴 기사 장 드 비엔이 지휘하에 11개월간 끈질기게 맞섰다. 그 감투 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훗날 로댕이 <칼레의 시민>을 제작하여 당시의 감동을 후세로 전달한다.
1348년 가공스러운 대역병인 흑사병이 6세기의 공백을 깨고 다시 유럽을 엄습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전체 인구의 1/3이 죽었다. 1350년에는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었다. 그러나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장 2세는 ‘생각이 느리고 일단 결정하면 고치기 힘든’ 성격을 지녔다.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한 잉글랜드 흑태자 에드워드와 1356년에 프랑스 중남부 도시 푸아티에에서 맞붙었다. 양상은 크레시 전투와 흡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병력이 네 배나 많았음에도 장 2세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360년 장 2세의 서명으로 브레티니 화약(和約)이 발효되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권을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 남서부와 북부의 칼레 지방을 양도받았다. 기옌 지방만이 아니라 푸아투, 페리고르, 리무쟁 등 프랑스 영토의 1/3을 차지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프랑스 남서부를 다스리는 아키텐 공작 작위를 내렸다.
와중에 잉글랜드에서는 와트 타일러 반란이, 프랑스에서는 플랑드르 외곽 지역과 북부 프랑스에서 자크리(Jacqurie) 농민 반란(1358년)이 일어났다. 특히 자크리 반란은 잉글랜드의 전쟁 포로에 대한 혹독한 몸값 요구가 발단이 되었다. 발루아 왕조가 몸값 마련을 위해 조세를 강화했고, 이 압력에 반발하여 터져 나온 불만이 씨앗으로 작용하였다.
잉글랜드가 방심했다. 프랑스 지방을 약탈하여 값비싼 전리품을 확보하고, 인질들의 몸값을 두둑하게 받아내어 흥청망청 썼다. 그 사이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1364년 샤를 5세가 즉위했다. 그는 먼저 내정에 힘써 초기 절대왕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세제를 정비, 재정을 확충하여 급여를 지급할 능력을 갖추었고, 소규모 병력을 상시 운영하였다. 1369년 11월, 샤를은 잉글랜드 흑태자의 아키텐 영지를 몰수했다.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잉글랜드가 손써 볼 틈도 없이 프랑스군은 아베빌과 퐁티외 공작령을 점령했다. 전면전을 피하고 급습과 매복, 야간공격으로 구성된 전술을 택했다. 흑태자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동생 랭커스터 공작 존은 야심만만했으나 정작 싸울 상대를 발견할 수 없었다.
1372년 마침내 에드워드가 와병 중인 흑태자와 함께 샌드위치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6주 동안 역풍에 맞섰음에도 항로에서 거듭 밀려 결국 잉글랜드로 되돌아왔다. 1373년 말 아키텐 공국은 사라졌고, 기옌 지방마저 축소되었다. 게다가 1376년 흑태자가 병석에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이듬해 6월 21일 에드워드 3세마저 예순다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곧바로 가공할 만큼 성장한 프랑스 해군 4,000명을 실은 배 50척이 영국해협을 건넜다. 라이를 약탈했고, 내륙 루이스를 불태웠다. 잉글랜드인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는 칼레 지방을 제외하고 잉글랜드가 정복했던 땅을 돌려받고 35년간 휴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병약했던 샤를 5세가 1380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벵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샤를 6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열두 살 어린 나이였다. 육감적이며 방종한 외국 여성 바이에른 왕국의 이자보와 결혼했다. 환락적인 생활을 했던 샤를은 허약한 혈통에 피로가 겹쳐 광기를 드러냈다. 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와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였다.
차제 프랑스 중심부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2세(재위 1363~1404)가 1384년 플랑드르의 유일한 상속녀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했다. 이것은 그의 형 샤를 5세 때 벌어진 일로, 북부와 동부의 국경지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현재의 베네룩스 3국 전역을 지배하게 된 그는 독일-프랑스 접경지대인 알자스 로렌까지 점령하면서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로 급부상했다. 게다가 그의 통치 중심은 점점 플랑드르 지방으로 이동했다. 한편 전투가 오랫동안 답보 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1389년 6월 18일 칼레 근처 루링겐에서 양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가 미상의 <윌튼 두 폭 제단화>이다. 무릎 꿇고 성모자를 알현하는 이가 작품의 주인공 리처드 2세(재위 1377-1399)이다. 아기 예수가 잉글랜드의 배너를 천사에게 넘겨주며 리처드를 축원한다. 그는 백년전쟁 중 맹위를 떨쳤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이다. 삼촌인 존이 섭정을 했는데, 재임 중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세 판단이 어두웠다. 16세에 결혼한 보헤미아 공주 앤과 사별 후 아홉 살 프랑스의 이사벨과 재혼했으나 결국, 이로 인해 폐위되었다.
작품은 내용보다 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제단화의 초기 형태로, 경첩이 달린 두 개의 패널로 구성되었다.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사용했으리라 추정한다. 당시 잉글랜드의 미술은 낙후되었기에 드물게 발견된 중세 국제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인다. 작품이 걸려 있었던 펨브룩 백작의 저택 ‘윌튼 하우스’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열 살에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부르고뉴의 ‘용담공’ 필리프 2세의 주선으로 샤를 6세의 아홉 살 딸 이사벨과 결혼했다. 그러나 반대파로부터 리처드가 지나치게 프랑스에 경사되었다는 불만을 샀다. 결국, 1399년에 폐위되었고 헨리 4세가 즉위했다. 이로써 랭커스터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반면 프랑스는 심각했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샤를 6세가 발작이 매우 잦아져 통치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섭정의 자리를 놓고 부르고뉴 공작 '겁 없는' 장과 오를레앙 공이 대립했다. 1407년 필리프의 아들 장이 그의 종형이자 샤를 6세의 형인 오를레앙 공 루이를 암살했다. 그러나 죽은 루이의 아들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의 딸과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에 대항함으로써 이들을 아르마냐크파라 불렀다. 두 세력은 다투어 적국 잉글랜드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기괴한 상황을 연출했다.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1415년 8월 11일 함대의 닻을 올렸다. 그의 전쟁 준비는 치밀했다. 목적지를 함구한 채 센강 하구 셰프드코에 상륙하면서 보급로가 끊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 병력의 1/3 가량 손실을 보았음에도 아르플뢰르를 얻었다. 칼레를 향해 260km 행군을 강행하여 10월 25일 프랑스 북부 아쟁쿠르에서 전투를 벌였다. 병력에서 절대 열세였으나 위치 선정과 전술 능력에서 앞서 승리했다. 헨리는 개선장군이 되어 11월 23일 런던으로 입성했다.
1417년 8월 1일 잉글랜드 군은 다시 투크 강어귀로 상륙했다. 헨리는 이번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노르망디로부터 시작하여 9월에 캉을 정복했고, 아르장탕과 알랑송을 장악했다. 거칠 것이 없었다. 1419년 아름다운 도시 루앙을 접수했다. 우세 속에서도 헨리는 프랑스 내 부르고뉴 파와 결속을 단단히 했다. 그러나 자신을 프랑스 국왕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한 부르고뉴 공작 장(Jean)이 사망했다. 아르마냐크 파가 술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대립이 점점 악화되던 1417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가 먼저 암살되고, 부르고뉴 파가 주도권을 쥐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1419년 장 1세 역시 도팽(프랑스 황태자, 훗날 샤를 7세가 된다)의 친구 샤텔에 의해 파리 몽트로 다리에서 살해당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이 협상 차 도팽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예를 표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순간 참살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아들 필리프 3세는 비탄과 분노에 이를 갈았다.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 함께 도팽과 아르마냐크파를 징벌하는 데 힘을 모았다. 헨리 5세가 미친 샤를 6세와 함께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인정받는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그리곤 샤를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면서 보답으로 ‘도팽을 참칭하는 자’와 아르마냐크 파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1420년 9월 1일 헨리와 부르고뉴의 필리프, 그리고 샤를 6세가 성대한 의례와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잉글랜드의 15년 파리 점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422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어린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 국가의 왕으로 등극했다. 반면 도팽이었던 샤를 7세도 왕위에 오름으로써 프랑스 왕위는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샤를은 정통성이 취약했다. 대관식은 신의 축성 없이 선언으로 그쳤으며, 그를 후원하는 아르마냐크파가 지나치게 잔혹하여 파리 등지에서 배척당했다. 상대적으로 섭정을 맡은 잉글랜드의 베드퍼드 공작 존이 프랑스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곁에는 충직하고 유능한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터규와 워릭 백작 리처드 비첨이 있었다.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가 벌여 도팽과 스코틀랜드 연합군을 물리쳤다. 국민국가로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이 시기가 잉글랜드-프랑스가 결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잘 나가던 잉글랜드가 삐끗했다. 프랑스가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자 잉글랜드의 약탈 전쟁이 한풀 꺾였다. 보급선에서도 차질을 빚자 잉글랜드는 1420년대가 되자 전쟁의 양상을 점령과 식민화로 바꾸었다. 그러나 프랑스 봉신들은 국왕조차 다루기가 만만치 않은 무리였다. 전쟁 비용은 두 배 이상 늘어난 차제, 이를 충당키 위한 조세 상승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1428년 오를레앙 포위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 자금이 부족한 형편에서 솔즈베리 백작을 사고로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도팽 측에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열여섯 살 양치기 소녀가 전선에 나타났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1412~1431) 한 명의 등장으로 전쟁 판도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뒤집혔다. 분석컨대, 지도력 부재에 시달렸던 도팽파 병사들에게 그녀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결과이다. 1429년 90일간 지속한 공성전 끝에 마침내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잔 다르크가 양 떼를 지키다가 들은 신의 계시를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도팽을 설득하여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샤를 7세가 공식 등극하는 동안 그녀는 한 손에 군기를 든 채 국왕 옆에 시립했다. 그녀는 5개월 내에 모든 소명을 완수했고, 정통성을 확보한 샤를은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진행되었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외곽에서 교전 중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파의 뤽상부르 백작에게 잡혔다. 그녀는 잉글랜드 측에 인도되어 루앙에서 마녀재판을 받고 1431년 5월 30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샤를 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435년 샤를 7세는 부르고뉴 필리프와 아라스 조약을 맺음으로써 내란과 함께 백년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부르고뉴라는 지지대를 잃은 잉글랜드는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1444년 투르에서 멘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2년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샤를은 전쟁을 통해 눈에 띄게 성장했다. 화약의 등장으로 기사가 등장하는 시대가 저물었다. 뒤 게클랭은 1370년대 대포 사용을 앞서 추진하였다. 그리고 봉건적인 군사 소집으로는 봉신과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전비가 수직 상승했다. 그는 휴전 기간 중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상비군을 모집했고,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1449년 궁수와 대포수를 구성하자, 때맞춰 잉글랜드가 샤를을 거들어 주었다. 잉글랜드가 브르타뉴 요새를 침공하여 먼저 휴전을 깨트린 것이다. 샤를은 전문화된 전력과 개량한 대포를 앞세워 루앙으로 입성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에 승리하며 노르망디 전역을 재정복했고, 1451년 마지막 잉글랜드 땅 기옌으로 쳐들어갔다. 잉글랜드는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에서 일흔다섯 살 백전노장 틸벗이 분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포술 전문가 장 뷔로가 있었다. 그의 300개나 되는 대포가 쏘아대는 십자 포화와 컬버린 소총을 이겨내지 못하고 틸벗은 전사하고 말았다. 10월 19일 기옌의 수도 보르도가 마침내 무조건 항복했다. 백년전쟁은 이렇게 프랑스의 승리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프랑스는 영토와 함께 언어도 통일했다. 공통불어가 국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민족 감정이 형성되어 전후 10여 년에 걸쳐 국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절대주의 체제의 초기 형태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