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의 엘 그레코
‘양식 주의’로 번역되는 마니에리스모에서는 예술가의 독창성과 상상력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활동한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위치한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의 ‘그레코’에 에스파냐의 정관사 ‘엘 El'을 붙여, 그냥 ‘그리스인’이라는 뜻이다. 대중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본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하여 이 예명을 즐겨 사용했다. 서양 문명의 기원, 크레타섬(당시 그리스령(領))에서 태어난 그는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1576년 10월경 서른다섯 살에 톨레도로 이주했다.
엘 그레코는 먼저 베로네세와 틴토레토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베네치아로 왔다. 이곳에서 그는 말년의 티치아노를 만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작품이 <참회하는 막달란 마리아(1577)>이다.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배운 그가 갑자기 활동 무대를 로마로 옮겼다. 당시 로마의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은 색채를 중시하는 엘 그레코의 베네치아 화풍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미켈란젤로가 강조한 선, 즉 데생을 우선하는 생각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색채는 단지 형태를 돋보이게 장식이며 감각에 의존하는 것으로, 예술의 진정성을 해치는 요소”라고 보았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찬미자인 전기 작가 조르조 바사리도 ‘그리스 방식(maniera greca)’을 이탈리아 회화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겼다.
역으로 그리스인 엘 그레코에게는 미켈란젤로가 존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는 교황 피우스 5세에게 누드로 인해 비난이 거셌던 <최후의 심판>과 관련하여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작품 위로 미켈란젤로만큼이나 완벽하면서도 새롭고 더 근엄한 가톨릭의 정수(精粹)에 맞는 그림을 다시 그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곳 작가들에게 미움만 사게 되었다. 이 문제는 일화일 뿐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 있겠으나 엘 그레코가 에스파냐의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 “미켈란젤로는 훌륭하지만, 그림 그리는 법은 몰랐다”라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스 클라크, <그림을 본다는 것>) 무모하게 보이는 이런 그의 자부심은 어떻게 배양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여하튼 로마에서의 마찰이 그가 에스파냐로 이주하게 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 듯싶다. 역사의 중심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졌듯, 그도 유럽 최고의 국제도시에서 보금자리를 틀었다. 에스파냐로서도 행운이었다. 이베리아반도는 이탈리아의 선진 예술에서 비켜 있었다. 그러나 엘 그레코가 있었기에 에스파냐의 미술은 17세기에 들어서서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에게서 파격적인 화면 구성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빛이 어떻게 자연과 인간의 신체를 부각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이탈리아에 머무를 때는 베네치아, 로마 파르네세 궁을 오가면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접했다. 그리고 고향의 비잔틴 미술과 융합하여 후진적이던 16세기 에스파냐 화단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엘 그레코가 속해 있던 교구 성당인 산토 토메 성당의 수호성인이자 250년 전에 죽은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이다. 집단 초상화와 종교화를 결합했으며, 특히 장례식은 회화에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주제였기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4세기 초 막대한 기부로 유명해진 곤살로 루이스 데 톨레도(작위명 세뇨르 데 라 비야 데 오르가즈)의 죽음을 기념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327년 돈 곤살로가 죽자 두 명의 성인, 성 아우구스티노(주교복 착용)와 성 스테파노(왼편 부제복 착용)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엘 그레코는 사실성을 초월하여 감성적인 '마니에리스모' 양식으로 그의 영적 세계를 표현했다. 화폭을 크게 둘로 분리했다. 천상과 지상, 그런데 '하늘의 영광'을 독특한 방법으로 구현했다. 구름 위에서 신비롭게 앉아 있는 천상의 인물, 특히 성 요한의 몸이 길게 늘어져 있다. 갑옷을 입힌 창백한 시신이 땅속으로 내려지는 동안 그의 영혼은 천사에 의해 예수를 향해 올라간다. 육신은 그림 아래 실제 그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듯 표현했다. 백작의 실제 무덤 위에 걸려고 한 데서 비롯된 아이디어다. 기발하다. 신도들이 그림을 보면, 마치 자신들이 지금 기적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유발한다.
전면에 백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아이가 보인다. 바로 엘 그레코의 여덟 살 된 아들 호르헤 마누엘이다. 그의 흰색 손수건에 아이의 태어난 해(1578)와 작가의 서명이 있다. 오른편 조문객 중 측면 얼굴의 흰머리 남자는 안토니오 데 코바루비아스이다. 화가의 친한 친구로, 당대 최고 지식인 중 한 명이다. 작품에 그의 얼굴을 넣어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대화가 가능했던 유일한 친구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 오른쪽 끝에서 레퀴엠을 읊으며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사제는 1586년 3월 18일 작품을 의뢰한 안드레스 누녜스 신부다. 이렇게 당시의 실제 인물을 넣었다는 면에서 일종의 집단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신부의 작품 의뢰에는 경제적 목적이 숨겨 있다. 오르가즈 백작이 임종하면서 가문이 교회에 매년 기부하도록 공증한 유서를 남겼지만, 후손들이 지급을 거부했다. 결국, 후손들이 패했으며 신부는 그림을 통해 성인의 지위로 격상된 고인의 신앙심을 상기시켜 교회가 누려야 할 권한을 강조했다. 여하튼 살아 있을 때 선행을 베풀면, 하늘에서 보답을 받는다는 점에서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신교와는 배치되는 반종교개혁의 메시지다.
그의 후기 작품, 요한묵시록 중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 이르러서는 마니에리스모 색채가 더욱 강해졌다. 요한묵시록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파트릭 데 링크, <세계 명화 속의 숨은 그림 읽기>) 따라서 세상의 종말을 그린 작품은 스페인의 반종교개혁과 종교재판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했다. 창백한 색감과 비례를 무시한 긴 팔다리, 비정상적으로 긴 육체의 뒤틀림, 비현실적인 빛, 그리고 강렬한 색채에서 양식의 특징이 뚜렷하다. 시대를 지배했던 고전주의 화풍을 벗어나 과감하게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서 엘 그레코가 독보적이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회화 세계는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이 일어나면서 뒤늦게 주목받은 화가이다. 20세기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자에게서 발견되는 사물의 왜곡과 과감한 색채 표현이 현대미술의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이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을 매우 파격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특히 인체뿐 아니라 풍경에까지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표출한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라 하겠다.
에스파냐 최초의 풍경화 <톨레도의 풍경>은 터너와 모네, 그리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함께 ‘하늘’이 유명한 작품이다. 분위기가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쾌락의 동산>과 닮았다. 3단 제단화 오른편 윗부분 ‘유황불로 덮인 지옥의 풍경’처럼 섬뜩하다. 심판의 날이 오기 전 음울함으로, 모두 빛의 마법이자 경고이다. 번개 치는 하늘과 검은 뭉게구름의 변화가 매우 불안정하다. 그리고 알카사르(성, 14~15세기에 만들어진 스페인 건축물)와 성벽, 성당의 종탑 등 금속 같은 시설물이 번개 빛을 토해내고, 언덕 풍경을 이룬 초록색은 더욱더 짙어진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유령이 사는 도시처럼 보인다.
작품의 형태와 색채가 예사롭지 않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시각 장애 혹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평가하기도 한다. 작품 속 흔들리는 듯한 대상, 극단을 오르내리는 명암법, 그리고 거친 붓놀림을 보면, 일면 그 평가가 타당성을 지닌다. 실제 엘 그레코는 늘 방 안에 커튼을 치고 어둠 속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동시대 또 다른 마니에리스모 대표 화가인 파르미자니노는 우울증, 폰토르모는 대인기피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모두 일반인의 내면보다 갈등이 치열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알카사르 궁, 알칸타라 강, 산 세르반도 성을 포함하여 도시의 동쪽 부분만 그렸다. 그것도 매우 자의적이다. 무엇보다 언덕의 경사를 강조했으며, 육중한 방호벽을 생략하고 실제로는 왼쪽으로 흘러야 하는 강의 바닥을 전면에 배치했다. 타구스강 계곡에서 바라본 눈높이에서는 실제 교회의 종탑이 보이지 않는다. 성 바로 옆에 붙어 있지도 않다. 돈후안타베라 병원의 크기를 줄여서 그렇다. 병원이 비사그라의 정문을 가릴 뿐 아니라, 돔이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너무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지적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 건물의 실제 위치는 지도에서나 확인하라.”
작품은 그의 후기작으로,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순수 풍경화다. 이를 위해 그는 전통적인 교리를 벗어나 풍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척박한 예술 환경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 톨레도와 그의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하긴 사람들은 이 도시를 ‘엘 그레코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살았던 세르반테스가 “바윗덩어리, 에스파냐의 영광, 에스파냐 도시의 등불인 톨레도여!”라는 표현과 서로 맥이 통한다. 엘 그레코, 그는 당시 에스파냐에서 두드러졌던 반종교개혁의 열망을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바로크 미술을 선도한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회화계의 이단아였다.
참고로 1516년 이사벨 여왕은 톨레도의 경치에 반해 주변 경관에 변화를 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이 무너질 경우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지으라고 했다. 이후 펠리페 2세 때인 1561년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다. 톨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 바야돌리드 등 왕가와 유대가 깊었던 도시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에서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1570년부터 미로처럼 얽혀 있는 중세 도로를 재정비했다. 중앙광장인 플라사 데 소코도베르를 다시 설계했고, 낡은 수도관을 교체해서 알카사르로 맑은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 그림과 함께 말년에 그린 <톨레도 전경과 지도>는 도시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새로운 이미지를 알리기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톨레도 역사와 지도에 관해 평생 연구한 살라사르 데 멘도사의 의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병원 행정 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작품 전경 구름 위에 서 있다. 결과적으로 수도를 다시 이곳으로 옮겨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 그곳 경치가 예전과 큰 틀에서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곳엔 톨레도를 끝까지 지켰던 엘 그레코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