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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19. 2022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르침볼도

르네상스 미술을 설명하면서 뒤늦게 빠진 이야기를 발견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관한 서술과 그곳 궁중화가 아르침볼도라는 매우 독특한 화가를 소개하는 글이다. 이사를 앞두고 있어 서둘러 글을 마무리한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에스파냐의 인연은 카를 5세부터 이루어졌다. 그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곳 왕위(카를로스 1세)를 물려받았다. 아버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1세와 에스파냐의 후아나 공주가 결혼한 덕분이다. 펠리페는 1506년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남편을 미치도록 사랑했던 후아나는 정신 이상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무렵 라인강 상류의 독일 남부인 오늘날 스위스 지역에서 출발했다. 13세기에 이르러 남부 독일과 북부 스위스에 걸친 지역을 통치하는 소영주로, 일개 백작에 불과했다. 1273년에 이르러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루돌프 1세, 재위 1273~1291)가 독일 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힘이 약했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느닷없이 선출된 경우지만, 어쨌든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엿하게 유럽의 왕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영지 내 소금으로 재정이 튼실해진 루돌프는 1278년 보헤미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를 본령(本領)으로 삼았다.

프리드리히 3세(재위 1440~1493)가 지금의 오스트리아 전체를 통합했고, 1452년 독일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다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대에 와서 큰 행운이 찾아왔다. 처가인 부르고뉴 공국의 네덜란드 영지를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제국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참! 당시 영지 내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영토에 자동으로 편입되는 지참품이었을 뿐이다. 1519년 막스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유럽 최강국의 맹주가 되었다. 게다가 신대륙과 동남아 식민지까지 더해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았다.’


카를은 이탈리아 전쟁(1494~1559)에서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자신의 시대가 완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누구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26년 동안 누적된 막중한 통치 부담과 프랑수아 1세와 오랜 전쟁으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다. 1555년 결국, 퇴위를 선언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인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위임하고 독일, 오스트리아, 동유럽 및 로마의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에스파냐, 나폴리, 네덜란드를 양여했다. 그리고 병든 몸으로 1557년 에스파냐의 산 헤로니모 데 유스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시계를 수리하고 시간을 맞추는 일에 전념했다고 하는데, 모든 시계가 동시에 같은 시각을 가리키게 하지 못하자 이런 말을 했다.


“시계 몇 개도 시간을 일치시키지 못하면서 제국의 모든 백성을 통솔하려 했으니 내 얼마나 주제넘었던가.”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역사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 최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카를은 종전 한 해 전인 1558년 쉰여덟 살에 외롭게 사망했다.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니고 있던 에스파냐는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종교 전쟁에서 강경책으로 일관하다가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 해군에게 패전한다.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태양이 저물었다.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준 신성로마제국도 1806년 8월 프란츠 2세를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19세기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제국을 이렇게 폄하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사실 로마와 관계도 없으며, 게다가 제국도 아니다.”


한편 전장을 빌려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유럽의 이류 국가로 완전히 전락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교훈을 도출할 수 있겠다. 인류 전체의 시계로 보면, 승리란 찰나에 대한 평가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이룬 권력이란 신기루와 같다.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황제 루돌프 2세


신성로마제국에는 매우 특별한 궁정화가가 있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 그는 이탈리아반도 밀라노 공국 출신이나 페르디난트 1세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1562년 프라하에 도착하여 빈과 프라하 궁정에서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등 3대를 위해 1582년까지 봉사했다. 호기심 많은 그는 막시밀리안 2세 때 와서 마음껏 ‘끼’를 펼친다. 4계절 각각 절기에 맞는 각종 식물을 조합하여 유쾌한 이미지를 창조했다. 봄은 꽃으로, 여름은 과일과 채소, 가을은 포도와 곡식,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나목으로 꾸며 그렸다. 


<베르툼누스(1590)>

드디어 대표작 <베르툼누스>가 탄생했다.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에 루돌프 2세(1576~1612)의 얼굴을 대입한 작품이다. 루돌프는 황궁을 빈에서 프라하로 옮기고, 예술과 학문을 열성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그는 엄연한 황제다.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황제의 초상화를 이리 그렸다. 어떻게 됐을까? 루돌프 2세는 그림 속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축제에 등장했다. 그의 상상력에 몹시 만족했다고 보아야 한다. 멋지다.

 

대 조셉 하인츠의 루돌프 2세 초상(1594)와 피테르 브뤼헬의 초기 작품 뒬레 흐리트(1564)

황제는 농민 화가 피테르 브뤼헬의 초기 작품 <뒬레 흐리트>도 구입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브뤼헬만의 해학이 담긴 흥미로운 작품이다. 뒬레 흐르트(Dulle Griet, 일명 Mad Meg)는 플랑드르 지방에서 성질이 급하고 탐욕스러운 여성에게 붙여진 경멸적 이름으로, ‘지옥을 약탈하고도 상처 없이 돌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형상화했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긴 칼로 무장한 그녀가 프라이팬, 접시, 잔 등 닥치는 대로 약탈한 모습인데, 황제의 취향만큼 매우 이색적이다.


그러나 <베르툼누스>는 다른 한편으로 연금술에만 파묻혀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군주에게 충언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베르툼누스가 ‘변화의 신’이기에 군주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 메타포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당시 사람들은 이 과일 초상화가 황제와 많이 닮았다고 평가한다. 아쉬운 점은 아르침볼도가 죽자, 화가의 독특한 상상력도 이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지지와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예술의 창의성은 불씨를 잃고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한 것이다. 4세기가 지난 후 초현실주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의 독창성이 인정받는다. 한편, 프라하도 루돌프 2세가 사망 후 합스부르크 가의 수도로서 역할이 끝났다. 따라서 아르침볼도의 컬렉션도 빈과 기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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