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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25. 2022

바르비종파의 대표화가 밀레와 코로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자연주의 풍경화에 몰입했다. 자연주의란 사실주의와 다름없다. 다만 모티브의 주류가 자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프랑스인인 그들에게 정작 영감을 선물했던 인물은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이다. 그는 현장에서 스케치하여 채색하는 외광파(外光派)의 문을 열었다.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가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함께 컨스터블의 화풍을 선호했다. 1847년에 그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주변에 화실을 짓자 많은 화가가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르시스 디아즈 드 라 페네(Narcisse-Virgile Diaz de la Pena, 1807~1876),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 1810~1865), 쥘 뒤프레(Jules Dupré, 1811~1889), 샤를 자크(Charles Jacque, 1813~1878)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갈등과 산업화한 도시를 피해 자연을 이상화하지 않고 각자 좋아하는 모티브에 따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중 특이하게 19세기를 대표하는 동물화가가 바로 콩스탕 트루아용이다. 그후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 1817~1878)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가 합류했다. 


1837년, 밀레가 국립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들라로슈 화실에 들어갔다. 녹록지 않은 파리 생활로 인해 초상화, 심지어 누드화까지 그렸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던 남자들이 나누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의 ‘벗은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만 그리는 화가’라는 평가는 밀레의 작품 세계를 180도 바꾸어 놓았다. 요즘으로 치면, 댓글 하나가 화가의 분발심을 자극한 꼴이다. 1848년 살롱 출품작 <키질하는 사람>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이듬해 친구 루소가 있는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부들이 겪는 현실에 관심을 집중했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밀레에겐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1857년 살롱전 출품작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1857)>

육체의 피곤함을 따뜻한 색채로 두텁게 덮어준다. 추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멀리 원경에 한 무리의 농부들이 추수한 밀을 마차에 가득 담는다. 올해는 풍년인가 보다. 그러나 전경의 세 여인의 모습은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농장에 고용된 인원이 아니다. 지주의 허락을 구해 이삭을 줍고 있다. 낟알 하나라도 더 주우려 허리를 깊이 구부린다. 오른편 여인은 잠시 허리를 펴보려 해보지만, 근육이 굳어 쭉 펴지지 않는다. 이삭 줍기는 당시 가난한 농촌의 풍습이자, 일상이었다. 오른편 원경에 말을 타고 있는 이가 일꾼을 감독하면서도, 어느 한 명이 많은 밀을 가지고 가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도시로 떠난 사내들을 대신한 그녀들의 햇볕에 타고 갈라진 손을 집중해 보면, 당시 곤궁한 농민들의 삶에 억장이 무너진다. 형식상으로는 신고전주의의 신세를 졌다. 세밀한 표정을 대담하게 제거해 윤곽이 뚜렷한 조각 같은 형태를 갖췄다.

밀레, <씨 뿌리는 사람(1850)>

살롱에 전시된 작품은 “비열하게 빈곤을 과장했다”라는 반응을 받았다. 1848년 혁명으로 민감해진 이들이 사회적 불안을 두려워한 데서 나온 의심이다. 그러나 밀레는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경사되지 않았다. 그에겐 산업화로 크게 변모하는 농촌에서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농민의 모습이 순교자처럼 경건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래서 신이나 역사적 인물을 담았던 대형 캔버스에 농민들의 노동에서 오는 피곤함, 가난, 그리고 체념의 흔적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노동하는 동작에 초점이 맞춰진 이유이며, 고흐가 수없이 모사했던 <씨 뿌리는 사람>이 영웅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까닭이다. 1889년 58만 프랑이라는 거액에 팔려 미국행을 떠났던 작품은 다음 해 애국심이 발동한 이폴리트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되사들여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농촌 출신 레옹 레르미트 (Léon Lhermitte, 1844~1925)가 영감을 받아 <이삭 줍는 여인들>을 그렸다. 그는 밀레보다 30년 늦은 1844년, 파리 북부의 조그만 시골 몽생페어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따라서 레르미트의 농촌 모습 역시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 1901년, 1922년에도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밀레는 1875년 세상을 떠나면서 루소의 무덤 옆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여 지금 그곳 샤이 시의 묘역을 찾으면, 두 사람의 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카미유 코로, <모르트퐁텐의 추억(1864)>

바르비종파 하면, 우린 지나치게 밀레에 경사되어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바르비종의 일곱 별’ 중 하나인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 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의 말년 작품 <모르트퐁텐의 추억>이다. 그는 은회색으로 부드럽게 채색하여 단순한 풍경에 시와 음악을 부여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던 화가다. 마치 동양화 같은 후기 단색조 풍경화는 대중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코로가 3천 점을 그렸는데, 그중 6천 점은 미국에 있다"고 할 정도로 모작이 가장 많은 화가 중 한 명이다. 

호수는 햇빛이 비치면, 수면과 나뭇잎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변화를 관찰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다. 전체적으로 색이 부드럽고 평온하여 잃어버린 감수성을 자극한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호수에 나온 소녀들을 담았다. 밤새 내려앉은 이슬이 습기를 내뿜으면서 희뿌연 대기를 형성한 것이 꿈속처럼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명암을 불명확하게 처리하는 그의 후기작 특성에 잘 나타났다. 오른편 커다란 나무에 달린 무성한 초록 잎과 왼편 나무의 가느다란 가지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마치 신화를 담은 어떤 우의를 묘사한 듯하다. 앉아 있는 소녀의 모자를 밝은 색 붉은 점으로 처리했는데, 보는 이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그만의 특징적인 기법이다. 


코로는 야외 작업을 통해 느낀 감정을 잘 간직해 두었다가 아틀리에로 돌아와 화폭에 옮겼다. 따라서 생동감이나 사실감보다 감정을 충실히 전달하는데 무게를 두었다. 그는 “자연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진실하게 묘사하라”던 스승 미샬롱의 가르침을 평생 간직하면서 작품에 임했다. 그리고 이 말은 인상주의 정신적 리더 피사로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코로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고, 그의 풍경화가로도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대인관계에서 항상 부드럽고 넉넉했다. 많은 화가가 그를 따라 바르비종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자신의 경제적인 여유를 가난한 동료 화가들과 함께 나누었다. 거처할 곳이 없던 친구 도미에가 집을 사도록 도와주었고, 밀레의 미망인에게 연금을 대주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자신의 작품처럼 늘 소탈하고 검소했다. 한편,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기초를 강조하면서도, 각자의 영혼을 따르도록 조언했다. ‘아버지 코로’라고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던 그는 도비니와 함께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가교 구실을 했다. 


콩스탕 트루아용의 <시장 가는 길(1859)>과 도비니의 <우아즈 강변의 빨래하는 여인(1865)>

도비니는 보불 전쟁을 피해 런던에서 힘들게 지내던 모네에게 화상 폴 뒤랑 뤼엘을 소개해 주었다. 뒤랑 뤼엘은 모네뿐 아니라 피사로의 작품도 구입했으며, 1871년 사우스 켄싱턴에서 열린 국제전에서 프랑스관의 출품을 도와주었다.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시슬레와 드가의 작품은 샀고 1872년 1월 스테벤스의 화실에서 마네의 작품 두 점을 발견 후 곧바로 그의 화실로 찾아가 유화 23점 모두를 3만 5,000프랑에 사들였다. 이런 그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으로 인해 작가들은 살롱전 불참과 2년 후 개최된 인상주의 첫 전시회를 현실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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