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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30. 2021

대항해 시대와 스페인

지금부터는 에스파냐 대신 국제적 용어인 '스페인'을 사용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세계 정복과 관련한 욕구는 유럽인만 지녔던 고질병이 아니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유럽 대륙을 탐했다. 바닷길을 통한 유럽 본토 침략이 여의치 않자 육지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서유럽은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잦은 침략으로 인해 내성이 생기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해갔다. 그리고 심기일전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틔웠다. 십자군 전쟁 당시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약탈해 온 고대 그리스 문헌을 중국 인쇄술로 대량 찍어내면서 시작됐다. 인문학이 발달하면서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근대 시민의식이 고양되었고, 각국은 관료제와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 무기 체계에서도 우르반 대포처럼 외형적 확장에 몰입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포병의 기동력을 중시했다. 또한 국가 간 잦은 전쟁으로 다양한 전술 전략 개념을 실험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빈에서의 전투는 1529년 9월,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에 의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2만 명의 병사와 72대의 대포로 맞섰다. 오스만군은 끊임없이 공격했지만, 빈 공략은 지체되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춥고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결국, 군수품과 함께 병사들의 사기까지 바닥이 나면서 겨울이 오기 전 오스만군은 포위를 풀고 서둘러 돌아가야만 했다. 비로소 서유럽 전체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레콩키스타가 완성되는 1492년 <그라나다의 함락> 장면. Francisco Pradilla Ortiz(1848~1921)가 1882년 완성했다.

이때 변방의 스페인이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피렌체에서 로렌초가 통치를 시작한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가 정략결혼했다. 당시 카스티야는 이베리아반도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고 인구는 65%, 600만 명이었다. 반면 아라곤 연합왕국은 면적 17%, 인구 12% 100만 명에 불과했다. 정치적 주도권은 당연히 이사벨 여왕에게 있었다. 1492년 1월 ‘레콩키스타(Reconquista, 기독교인에 의한 국토회복운동)’가 종료되었다. 이베리아반도가 가톨릭 국가로 통합한 당시 스페인은 4개 연방 체제였다. 카스티야, 바스크, 발렌시아, 그리고 카탈루냐이다. 카스티야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배적이지만,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독자성이 강했다.  2017년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 투표를 시행했던 곳이 바로 카탈루냐이다. 

스페인은 이탈리아처럼 섬과 같은 나라다. 반도로 이루어졌지만, 북쪽으로 피레네산맥이 장벽처럼 가로막았다. 유일하게 프랑스하고 접경을 이룬 가운데 삼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다. 대서양과 지중해. 그 지중해에 연한 지방이 카탈루냐이며 중세 프랑스 남부, 특히 랑그독에 뿌리를 둔 곳이다. 서유럽에서는 스페인의 국가 정체성을 독특하게 인식한다. 나폴레옹이 1808년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장병들에게 한 발언, ”이곳부터 아프리카가 시작된다”라는 말에서 그 단면을 보여준다. 실제 나폴레옹이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럽과는 다른 특색을 가진 곳이라는 은유임에는 틀림없다.

 

1492년 스페인에는 세 가지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콜럼버스의 출항, <스페인어 문법>의 발간, 그리고 앞서 설명한 레콩키스타의 완성이다. 이중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한 일련의 과정을 말하는 레콩키스타의 완성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 순혈주의의 승리면서, 스페인이 자랑하는 다양성과 혼종성은 사라졌음을 시사한다. 세비야에는 지금도 카스티야 귀족 출신 엘 시드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1세기에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 사라고사에서 봉사한 엘 시드는 무훈과 훌륭한 인격으로 기독교인과 이슬람인 모두의 영웅이었다. 레콩키스타는 십자군 전쟁을 닮았다. 코바동가에서 기독교군이 이슬람 무어인을 격파한 722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답보 상태에 빠졌던 전쟁은 1085년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회복하면서 기독교 우위를 확보했다. 그리고 1492년 기독교 부부 왕에 의해 전쟁은 종식되었다. 그 결과, 4개월을 시한으로 이교도 이슬람인과 유대인은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관용성을 발휘하여 이주민을 받아들인 인물은 의외로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다. 유대인은 자유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네덜란드는 멀리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온 유대인과 유럽 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신교 이주민을 받아들여 산업과 문화에서 유효한 성과를 거두었다. 

스페인 내 유대인 인구 8만 명 중 대략 절반은 개종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나 1489년부터 종교재판소의 마녀사냥이 본격화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재판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이후 100년간 이교도는 물론 같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도 갖가지 박해가 자행되었다. 이런 스페인의 종교적 경직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한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 의해 전 유럽으로 전염되었다. 그러나 30년 전쟁에서 패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음으로써 가톨릭의 수호자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그 역할이 무너졌다. 유럽의 정치가 종교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대신 민족주의가 그 공간을 메우면서 절대 왕정 간 부국강병을 강력히 추진했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혈통'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쉽지 않다. '근대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국민' 정도로 보면 무난하다.

 

콜럼버스의 항로와 그의 지도(1490), 출처 : Wikipedia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크리스트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도와 신대륙 개척을 지원한 인물 역시 이사벨 여왕이다. 레콩키스타 이후 오스만 튀르크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득세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가 막혔다. 지중해 무역이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 포르투갈이 먼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개척했다. (제목 사진은 포르투갈 까보다로카에서 바라본 대서양) 바다가 장벽이 아니라 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능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인구 100만 명의 작고 가난한 나라였다. 향신료를 독점하여 300% 가까운 이윤을 남겼고, 특정 선박이 무역할 수 있는 면허장 카르자즈(cartaz)을 발행하여 뱃길을 통제했다. 생각을 바꾸면, 작은 나라도 얼마든지 세계 무대에 우뚝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바닷길을 상상조차 못 한 채 명나라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포르투갈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현장을 목격한 스페인은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다. 최초 향신료를 목적으로 했다. 냉장법이 개발되지 않은 유럽에서는 부패해서 냄새나는 고기를 먹어야만 했고, 향신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향신료는 질병을 예방해 준다고 믿어 값이 모피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비싸졌다. 콜럼버스가 돌아오기엔 부족한 비축물을 싣고도 서쪽으로 더 멀리 인도를 향해 떠났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내린 용단이었다. 

어떤 이는 콜럼버스의 ‘착각’이 역사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폄하한다. 사실이다. 그는 지구의 원주를 실제의 3/4으로 계산함으로써 예상보다 긴 70여 일간 혹독한 항해를 자초했다. 하지만 당시 산타 마리아 호는 배수량 230톤, 시속 5~9노트 정도의 범선이었다. 그리고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에선 선원 2/3이 괴혈병으로 죽었고, 마젤란의 세계일주에서는 출발 인원 256명 가운데 18명만 3년 뒤 무사 귀환했다. 따라서 1492년 8월 3일, 스페인 팔로스 항에서 세 척의 배로 떠난 콜럼버스의 출항은 목적과 상관없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내린 위대한 결단이 분명하다.  

다행히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신항로를 발견했다. 스페인은 대서양 시대이자 대항해 시대, 다른 말로는 야만의 식민주의 시대를 주도했다. 금과 은이 넘쳐났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낭비했다. 해외 식민지라는 화수분이 그들의 사치와 방종을 오히려 조장했다. 게다가 유대인 등이 떠나면서 산업과 금융업에서 공동화가 초래되어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은 파산했고 이류국가로 내려앉았다. 


세비야 대성당 내 콜럼버스의 관. 그의 소망대로 스페인 땅을 밟지 않은 채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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